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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05.16 14:05수정 2025.05.1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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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지인들과 전라북도 무주에 있는 공방 <진묵도예>를 방문했다. 공방을 운영하는 도예가 김상곤 작가는 한국 전통 가마인 오름 가마를 직접 만들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도기를 굽는다.
그는 도예가 '불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흙으로 성형을 잘해도 어떤 불이 어떻게 닿느냐에 따라 모양과 색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붉은 염료로 정성스럽게 색칠한 줄 알았던 도기가 흙과 불이 만나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색과 무늬라고 해서, 실은 깜짝 놀랐다.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불의 온도나 세기가 적절하도록 '불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그 분위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장작을 넣는 타이밍(timing)을 아는 것은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 몸으로 익힌 장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이구나 싶었다.
적절하게 장작을 넣을 타이밍

▲ 도자기(자료사진).
earl_plannerzone on Unsplash
작가가 한 '적절하게 장작을 넣은 타이밍'이란 말을 계속 곱씹게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삶이란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화력(火力)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때가 바로 맞춤한 장작을 넣어야 하는 때가 아닐까?
나 역시 나이 오십을 앞두고 무기력해졌던 기억이 난다. 인생의 내리막길이 시작된다는 불안감이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는 아이들을 챙기고, 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바쁜 삶의 한복판에서 역설적으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내가 삶에 넣은 큰 '장작'은 글쓰기였다. 나를 성찰하는 글쓰기는 가까운 가족부터 내가 속한 사회까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모인 글로 책을 출간하고, 책과 관련한 방송, 강연, 팟캐스트 제작, 진행까지 이어졌다.
내 삶에 또 다른 색과 무늬를 만들어주는 훌라

▲ 전북 무주 <진묵 도예> 김상곤 작가가 도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경숙
읽고 쓰고 말하던 내 삶의 가마에, 새로운 불꽃을 일으킨 장작이 있다. 바로 '하와이안 댄스 훌라'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훌라는 내 삶에 또 다른 색과 무늬를 만들어주고 있다(관련 기사:
50 넘어 알게 된 '엉덩이를 해방한' 기쁨 https://omn.kr/239ct ).
이국적인 하와이 음악에 맞춰 춤동작을 외우고 연습하며 작은 성취감을 맛본다. 크고 작은 무대 공연, 버스킹(거리공연) 등을 통해 관객을 직접 만나는 새로운 경험도 하게 된다. 최근엔 놀이동산에서 숙련된 공연단만 가능한 줄 알았던 퍼레이드(행진) 공연도 했다.
지난 4월 8일, 내가 속한 훌라팀 훌라당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윤중로에서 열린 '2025 여의도 봄꽃 행사' 첫날 퍼레이드에 초대받았다. 여의도 '봄꽃 행사'는 -정식 명칭은 벚꽃이 아닌 봄꽃이다- 원래 4일이 개막식이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선고일과 겹치며 8일로 미뤄졌다.
오히려 탄핵의 기쁜 소식과 늦은 벚꽃 개화가 맞물렸다. 축제 첫날 벚꽃 만개율 80%에 이르러 윤중로는 벚꽃으로 가득 찼다. 낮 최고온도가 23도까지 오르면서 따뜻한 봄 햇살과 봄바람까지 분위기를 북돋웠다.
그래서인지 평일 오후인데도 여의도 윤중로엔 벚꽃만큼이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 팀은 어깨가 나오는 팔라우키(훌라 공연 때 입는 하와이 전통 튜브톱)와 무지개색으로 골고루 분산해 화려한 파우(훌라 출 때 입는 치마)를 입었다. 초록 나뭇잎 레이(lei; 꽃, 잎 등을 엮어 만든 꾸러미 목걸이)를 건 20여 명이 훌라를 추며 행진했다.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춤추기는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앞뒤 다른 팀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종종걸음을 걷거나 뛰어야 할 때도 있었다. 행사 음악과 뒤섞여서 훌라 음악이 잘 들리지 않기도 했다.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윤중로에서 열린 '2025 여의도 봄꽃 행사' 첫날 퍼레이드 공연을 하고 있는 훌라팀 훌라당
윤이나
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손뼉 치며, 환호해주는 사람들을 보니 힘든 것을 잊고 신나게 훌라를 출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다. 어깨가 드러난 의상을 보고 춥지 않냐며 걱정해 주는 이, 우리의 맨발에 상처가 날까 우려하는 이, 하와이에서 온 공연팀이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우리가 춤을 추며 보내는 미소에 쑥스러워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덩달아 함께 따라 춤추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즐거운 사람은 나였다. 하늘 올려다보는 동작을 할 때마다, 벚꽃이 보였다. 옆을 돌아보면 훌라를 함께 추는 오하나(하와이어로 '가족'을 뜻하는데, 혈연 관계뿐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쓰인다)들 역시 꽃이었다. 그 속에 있으니 나도 꽃이 되었다. 꽃이 가득했던 잊지 못할 봄의 축제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만(滿)'이 아닐까 싶었다.
벚꽃은 만개(滿開), 관객은 만원(滿員), 내맘은 만족(滿足).

▲ 주말아침이면 한강공원에서 만나 맨발로 훌라를 춘다.
윤연희
퍼레이드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는데 한 중년의 여성이 부스에 와서 훌라를 배우고 싶다고 수줍게 물어봐서 기뻤다. 자기 또래인 나를 보고 용기를 얻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훌라가 그의 삶에 새로운 장작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가끔 내가 글을 좀 더 빨리 쓰기 시작했더라면 더 트렌디하게 글을 쓰고, 다음 책도 열정적으로 추진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훌라를 좀 더 빨리 배웠더라면 순서도 잘 외우고, 유연하게 동작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아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충분하다, 충분히 행복하다. 수분을 날린 마른 장작이 더 오래 타듯이 잘하려는 욕심을 덜어낸 마음이 글쓰기와 훌라를 더 오래 즐길 수 있게 하리라 믿는다. 그렇게 읽고 쓰고 말하고 춤을 추는 내 삶의 온도를 유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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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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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남은 것 같던 때, 나를 더 살고 싶게 만든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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