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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빗발치는데도 습지에 도시 세운 이유, 이거였구나

약 1500년 전에 상하수도체계까지 구성... 백제 부흥 꿈꾸며 만든 도시, 부여

등록 2025.05.18 14:28수정 2025.05.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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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도읍이다. 123년은 오로지 사비(泗沘)의 시간이었다. 성곽을 둘러 왕궁을 가두지 않았다. 모든 걸 열어두고 융화에 힘썼다. 격자형 가로망이다. 해양 제국을 꿈꾼 한 사내의 웅혼한 꿈이 금강을 낀 신도시로 구현되었다. 이처럼 열린 도읍을 어디부터 봐야 할까.

먼저 하나로 모든 걸 들여다볼 수 있는 무엇을 찾기로 한다. 충남 국립부여박물관으로 걸음을 놓는다. 백제 문화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를 보기 위해서다.


마주하니, 다시금 감탄 그 자체다. 수차례 만났어도, 볼 때마다 넋을 잃을 지경이다. 용이 발 셋으로 안정되게 바닥을 디뎠고 치켜든 한 발은 삼라만상을 움켜쥘 태세로, 몸통과 꼬리를 둥글게 감아올렸다. 조화롭다.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일까, 머리는 승천하는 기상을 한껏 뽐내며 입을 크게 벌려 용트림한다.

금동대향로 능산리 고분군의, 위덕왕 때 지은 사찰 터에서 발견되었다.
▲금동대향로 능산리 고분군의, 위덕왕 때 지은 사찰 터에서 발견되었다. 충청남도청

연꽃 만발한 아래 몸통이 넉넉하다. 꽃잎엔 두 분 신선과 날개 달린 물고기, 사슴 등 기기묘묘한 동물 26마리가 깃들었다. 위 몸통엔 74개 산봉우리가 솟았다. 산엔 11분 신선이 39마리의 날짐승·길짐승을 비롯한 상상 속 동물과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과 살고 있다.

꼭대기 바로 밑에서 5인의 악사가 피리·비파·퉁소·거문고·북으로 백제 노래를 합주 중이다. 맨 꼭대기, 긴꼬리의 봉황이 턱 밑에 여의주를 끼고 날개를 펴 멀리 날아갈 채비 중이다. 봉황의 존재로 향로는 안정감과 아름다움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역시 백제'란 말이 나온다. 절제된 금색으로 치장한 향로는 그 정교함이나 조화로움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걸작을 만나는 호사는, 누구 덕분이란 말인가? 당시 아비 잃은 아들의 한이 하늘에 가닿아서였을까?

아비 성왕이 쌓은 나성 밖 능산리에, 아들이 능원을 만들어 아비를 모신다. 아비의 죽음에서 아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비애를 맛보았다. 위급에 내몰린 아들을 구원차, 몸소 전쟁에 나선 아비가 신라의 기습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관산성 전투는 냉혹 그 자체였다. 아들 위덕왕이 애절함으로 아비를 기리는 절을 짓고, 아비 넋을 위로할 향로를 들인다. 살아생전 아비의 꿈이 새겨진 최고의 걸작이어야 했다.

해양 제국으로 뻗어나갈 발판, 여기여야 했다


웅진에서 권좌에 오른 젊은 아비는 고민에 휩싸인다. 한성백제의 기백을 되찾는 건 물론, 이 모든 질곡을 끊어 내고 싶었다. 해양 제국으로 뻗어나갈 발판을 마련하는 게 유일한 해법으로 보였다. 그러려면 물길을 확보해 큰 항구를 갖춰야 한다.

부여(1872년지방지도_부분) 백마강을 중심으로 주변의 관청과 경승지 등을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사비성의 흔적이 약하게 남았다.
▲부여(1872년지방지도_부분) 백마강을 중심으로 주변의 관청과 경승지 등을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사비성의 흔적이 약하게 남았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왜에서 들여오는 커다란 목재가 배로 오지 못하고, 사비에 내려 육로로 웅진까지 옮겨지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웅진은 강폭도 좁고 수심이 얕기 때문이란다. 바닷물이 사비하(河)까지만 들어온단다. 이는 조수간만과 바람이 사비하까지는 닿는다는 뜻이었다. 사비 북쪽과 서쪽을 강이 반달처럼 휘감아 돌아 나간다. 천혜의 도읍지로 여겨졌다.

맞춤한 경사의 부소산이 방어에 유리한 여건을 갖췄다. 바닷물이 닿는 사비하는 천혜의 해자(적의 접근을 막는 성곽시설)로 손색이 없다. 넓게 열린 습지는 백성에게 피해 줄 염려도 없었고, 내륙 깊숙한 강가는 방어에도 유리하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장점일 뿐, 여기에 백성이 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수시로 물이 차오르는 습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귀족의 빗발치는 반대도 그만한 이유는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불모지에, 고구려의 공격이 시작되면 방어하기 불리하다는 주장도 비등하다. 하지만 젊은 왕은 이미 마음을 굳힌 터다. 이런 약점을 극복할 방안을 마련한다. 강과 지형은 하늘이 내려준 조건이다. 그러나 그런 땅에 도시를 건설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궁남지 무왕이 파고 물을 채워 뱃놀이 했다고 하나, 사비성 조성 당시부터 물이 고인 곳을 파 두었을 개연성이 높다.
▲궁남지 무왕이 파고 물을 채워 뱃놀이 했다고 하나, 사비성 조성 당시부터 물이 고인 곳을 파 두었을 개연성이 높다. 부여군청

일단 땅을 세세히 조사한다. 중국에서 기술을 배워온다. 솟는 물을 한데 모을 방안을 구상한다. 지형과 경사를 따라 크고 작은 물길을 낸다. 그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이 고이는 곳마다, 크고 작은 연못을 판다. 무왕이 팠다는 궁남지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파낸 흙은 땅을 다지는 데에 사용한다.

물기 축축한 진흙 덕을 보다... 도읍 세우는 데 들어간 노동력

향로가 발굴된 절터가 단정하다. 사비가 습지였으니, 물기 축축한 진흙은 향로가 1300년 동안 부식되지 않을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이처럼 무른 땅에 도읍이 섰다.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층으로 다지는 '판축공법'에 나뭇가지 등을 섞어 다지는 '부엽토공법'으로 보완했다. 습지를 극복한 기술이다.

관북리와 부소산 백제 왕궁의 중심지인 관북리와 부소산성. 관북리에서 격자형 가로망과 'U형'의 물길 유적이 발굴되었다.
▲관북리와 부소산 백제 왕궁의 중심지인 관북리와 부소산성. 관북리에서 격자형 가로망과 'U형'의 물길 유적이 발굴되었다. 부여군청

사비가 있어 꿈이 익었다. 무엇보다 바닷물이 와닿는 천혜의 조건으로 항구를 둘 수 있었다. 강에 잇닿은 부소산 앞, 편평하고 너른 사비원(原)은 도읍으로 최적이다.

당시 오랜 공사에 물난리가 빈번했다. 고구려의 침범도 무참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반대와 난관을 극복해 냈다. 무른 습지를 결국 도시로 바꿔냈다.

동쪽에 남북으로 긴 나성을 쌓았다. 나성이 긴 행렬로 행군하는 군대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잇대어 북쪽에도 나성을 쌓았다. 홍수가 최대 위협이나, 이를 막는 게 전부는 아니다. 도읍 방어를 겸했다. 사비하와 나성이 도성의 성곽 같은 존재였다.

동 나성 사비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쌓은 나성. 사진 중하단의 네모난 터에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멀리 부소산 아래로 부여가 보인다.
▲동 나성 사비의 동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쌓은 나성. 사진 중하단의 네모난 터에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멀리 부소산 아래로 부여가 보인다. 부여군청

사비성 방어는 3중 체계다. 사비 밖으로 산성 4곳(청마산성, 석성산성, 가림성, 증산성)이 1차, 사비하와 나성이 2차 방어선이고 부소산성과 그 옆 청산성이 최종 방어선이다.

사비를 계획하고 건설하는데 십수 년이 소요됐다. 국력은 물론 백성의 헌신적인 공력이 있었다. 갖은 난관을 극복하는데 정림사 중심의 불심이 큰 도움이었다. 이제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적으로 고구려와 신라는 물론 바다 건너 당과 왜까지 경영할 웅대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제국의 기틀이다.

처음부터 원대하게 구상한 신도시다. 제아무리 완벽한 계획이라도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허사다. 도읍 세우는 어마어마한 공사에 백성의 노동력은 필수다. 나라의 스승으로 칭송받는 '겸익' 선사가 나섰다.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내는 일에 정성을 다한다.

하늘이 그에 감복했을까. 꿈에 전설의 황금새가 나타나, 예언처럼 날아간 곳이 사비 땅이었다고 한다.

정림사 사비 한가운데, 도읍 조성에 마음을 모아 준 백성을 위해 지은 사찰이다.
▲정림사 사비 한가운데, 도읍 조성에 마음을 모아 준 백성을 위해 지은 사찰이다. 충청남도청

선사 겸익이 도읍 한가운데 백성의 마음을 담아 사찰을 짓자고 한다. 정림사다. 왕궁 앞이다. 백제 사찰의 원형인 1금당 1탑 양식을 빌어, 정남향으로 정갈하게 터를 닦는다. 절 입구인 중문 밖에 연못을 판다. 물 빠짐은 물론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연을 심는다.

마치 나무를 깎아 만든 듯한, 5층의 아담하면서도 완벽한 비례를 갖춘 석탑이 선다. 옆엔 남북으로 쭉 뻗은 주작대로가 지난다. 백성의 마음이 모인 터가 도읍이듯, 힘을 모아 준 백성에 대한 보답이 정림사다.

국제항 구드래 성왕이 사비를 구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시설. 나중 국제 무역항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뤄진다.
▲국제항 구드래 성왕이 사비를 구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시설. 나중 국제 무역항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뤄진다. 부여군청

도읍을 모태로, 백마강에 잇대어 국제무역항을 구상한다. 구드래 항이다. 구드래에 왜와 유구국, 당나라를 오가는 수많은 무역선이 그득하다. 갖은 물화가 들고 난다. 낯선 이국 상인이 생소한 말투로 흥정하고, 거간꾼의 손 발짓은 분주하기 그지없다. 짐을 싣고 내리는 일꾼의 땀이 굳센 근육을 타고 흐른다. 아비의 오래전 꿈이 분주한 노동으로 왁자하다.

물길을 내 상하수도체계를 만들다

다진 땅에 가로를 구획하여 필지를 나눴다. 나뉜 필지에 적정한 용도를 계획한다. 격자형을 기본으로 가로망이 짜였다. 가로를 따라 'U자' 형 물길을 내어 도읍이 쓸 상하수도체계를 구성했다.

건강한 도시를 담보하는 위생체계다. 곳곳을 파내어 연못을 만들고 우물과 배수시설을 촘촘히 연결하니, 물 빠짐이 원활해졌다.

부여 전경 백마강과 부소산성, 그 아래로 격자형 가로망이 중첩된 도시 형상이 뚜렷하다. 사진 중하단에 정림사가 보인다.
▲부여 전경 백마강과 부소산성, 그 아래로 격자형 가로망이 중첩된 도시 형상이 뚜렷하다. 사진 중하단에 정림사가 보인다. 부여군청

웅장하나 실용적인 궁궐을 그곳에 앉힌다. 각 기능의 시설이 계획대로 들어서니, 도읍이 윤곽을 드러낸다. 격자형 가로에 기초적인 방어시설을 설치하고, 유사시 부소산성으로 나라 기능을 옮겨 장기 농성할 방어체계를 세운다.

산성은 2중 성벽이다. 퇴뫼식과 포곡식이 혼용되었다. 낭떠러지를 활용하고 산성 북동쪽을 방어할 청산성으로 2중 방어벽도 구축하였다.

부소산성 흙을 다지는 판축공법과 나뭇가지를 넣어 다지는 부엽토공법을 활용, 2중으로 쌓은 성벽.
▲부소산성 흙을 다지는 판축공법과 나뭇가지를 넣어 다지는 부엽토공법을 활용, 2중으로 쌓은 성벽. 부여군청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기며 '남부여'라 칭한다. 옛 부여 시절의 영광을 잇겠다는 포부다.

긴 세월 쏟아부은 공력에 대한 보답일까. 이후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는다.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비록 꿈이 깨졌어도, 한성에서 쫓겨온 근인은 해소한 셈이다.

새 도읍은 '날이 밝는다'는 뜻의 扶餘(부여)로 '새벽의 터전'을 담아냈다. 아비 성왕은 이곳에서 백제 부흥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나라를 강고한 기틀에 재건하고 세우겠다는 선언이다.

그의 꿈처럼 백제는 해양 제국으로 거듭난다. 특히 왜에게 불교를 비롯한 각종 문물을 전수한다. 흔적으로 남은 사비성에서 1400년 전 한 아비의 웅대한 꿈이 보인다.

그렇듯 계획된 신도시가 곧은 길과 연못, 절터와 나성으로 남았다. 1400년 된 그의 꿈이, 충남 부여에서 여전한 생명력으로 시민의 삶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사비 #금동대향로 #성왕 #위덕왕 #구드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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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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