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연간 《문학수첩》(2025년 상반기호)
문학수첩
"저는 어려서 공부엔 관심도 없고, 자전거도 못 타는 운동 신경에 내세울 만한 특기도 없었어요. 기계처럼 학교랑 집만 오갔고, 부모님은 바쁘셨어요. 종종 혼자 좁은 방 구석에 앉아 창밖만 멍하니 보던 기억이 많아요."
그 뒤 결혼과 육아는 그녀에게 새로운 질서를 안겨줬지만, 동시에 정체성은 균열을 겪었다.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2014년, 생협 활동 중 문화유적지 탐방 후기를 썼는데 처음으로 글로 칭찬을 받았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구나"라는 경험이 전환점이 되었단다.
문화센터 수필 강좌를 거쳐 감정을 담는 짧은 문장에 더 끌렸고, 시 창작 수업에 들어가며 "나도 시를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2020년 《현대문학》 최종심에 오른 게 전환점이었어요. 당선을 기대하지 않아서 심사평도 안 봤는데, 2년 뒤 지인이 제 이름을 발견하고 알려줬어요. 그 뒤로 매년 본심에 오르며 바닥이던 자신감이 조금씩 채워졌죠."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에서 시가 합평에 올라간 날, 동료들은 그녀가 이미 등단한 시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마르지 않은 그림>이라는 시 제목이 멋지다는 반응도 있었단다.
"사실, 그날은 시를 꼭 내고 싶어서 낸 게 아니었어요. 학교에 가면 어쨌든 한 편은 내야 하니까. 시는 결국 혼자 쓰는 거라고 생각했고, 누군가의 평가는 참고일 뿐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나는 '퇴고를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말이 나한테 건방진 확신을 준 거죠. 다행히도, 감사하게도, 주변 분들이 좋게 봐주셨던 거예요."

▲ 소후에 시인의 책상. 그녀의 세계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후에
"시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예요"라는 그. 문학수첩 등단작 '희고 말랑한 문'을 펼쳤다. 시를 잘 모른다는 그녀의 딸도 다음 구절을 좋아한다고 했다.
'희고 빛나는 것은 전부 문 같아
우리는 손을 내밀게 되지
아무리 영혼을 힘껏 돌려도
세상 끝에서 헛돌 뿐이지만
우리는 비명을 지르지 말자고 했었다
마음이 결결이 찢겨 어두운 강물에 흠뻑 젖더라도
우린 추락하지 않는 미래니까'
수상 소감에서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라고 보뱅은 말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넘을 수 없는 꿈에 문을 그린 후, 제 시를 밤낮없이 깨웠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서기엔, 시는 너무나 작고 얕고 미력했습니다. 그런 시에겐 어둠만이 신겨졌던 걸까요? 절망의 걸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자리만 맴돌았습니다. 혼돈의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갔습니다. 그럴수록 시는 단단한 살이 붙고, 뜨거운 피가 흐르게 되었죠. 용기가 일었습니다."
시를 쓴다는 건 내 '방'을 갖는 일
2023년 3월, 습작에 지쳐갈 즈음, 문우의 추천으로 그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에 입학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동료들과 시를 읽고 쓰며 '학생'이 되었다.
"시의 결은 다르더라도 열정에는 격차가 없어요. 비교적 나이 드신 문우들이 현대시에 무관심하거나 비판적 태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죠."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수료 중인 소후에 시인.
리제이스튜디오
그녀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거창한 배경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만의 방' 없이도 꿈을 일군 한 엄마의 용기 때문이다.
소후에 시인에게는 자신의 방이 없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딸이 없는 평일엔 딸의 방을 쓰고, 주말엔 거실로 나와요. 친구들은 '야, 거실이 제일 넓어'라면서 웃지만… 저는 그냥 나그네 같아요."
그녀가 말한 '방'은 단순한 공간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선과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롯이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자리. 자아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구나 주부라면 누구라도 마음 한편에 그런 방 하나쯤은 품고 있지 않을까.
"콜센터 아르바이트도 해 보고, 간호조무사 학원도 다녀보려 했지만, 결국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내 방'을 갖는 일이었어요. 시를 쓴다는 건 내 방을 갖는 일이었던 거죠."
그녀는 다 쓴 몽당연필을 유리병에 모은다고 한다. 시집을 사고 필사하며, 천천히 써 내려가는 모든 시간이 은밀하고도 깊은 기쁨이었다.
"다 그만두겠다고 말해 놓고도, 다음날 아침이면 또 책상 앞에 있더라고요."

▲ 소후에 시인의 몽당연필. 쓰고 남은 연필들을 유리병에 모아 놓았다.
소후에
책상이라는 작은 세계. 물리적 방이 없더라도 그녀는 그곳에서 온전히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시를 쓰고, 읽고, 사색하는 시간은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희고 말랑한 문' 외 4편은 그렇게 생활과 책상 사이에서 태어났다.
"등단했다고 갑자기 뭔가 달라지진 않아요. 오히려 더 두렵고, 더 부끄러워요. 저는 지금도 정진 중이에요."
그녀는 시를 '친구였다가, 애인이었다가, 지금은 엄마 같은 존재'라 했다. 세상에 대해 고자질하고, 함께 웃고 우는 존재.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던, 시라는 이름의 방.

▲소후에 시인에게 선물받은 노트. 그녀는 시노트의 제목을 '소음들의 도시'라고 붙였다. 단어가 자신의 구원이 되었다고도 했다. 좋은 시어들을 모아보라며, 그 노트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서나연
그녀의 당선작 '구름모자'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시위하듯 구름을 쓴다. 하늘엔 저마다의 구름이 있고 그곳엔 추락하지 않는 문이 있다고'
누구나 문을 열 수 있다
소후에 시인의 도전은 "시를 몰랐던 사람도 꾸준히 노력하면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늦은 나이, 생소한 분야라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녀는 기어코 자기 삶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나도 시를 써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소후에 시인의 이야기는 실질적인 용기와 영감을 줄 것이다.
"제가 몸소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같은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시인이 된다는 걸."
방 하나 없이 시작된 꿈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닿을 수 있는 자리일지 모른다. 그녀의 여정을 인터뷰하는 내내, 내 가슴에도 작은 불씨가 움트는 듯했다.

▲ 2025년 반연간 문학수첩 작가 매거진 토크 포스터
문학수첩
한편 소후에 시인은 오는 5월 24일(토) 오후, 《문학수첩》 등단 작가들과 함께 서울 성북구에서 열리는 북토크에 참여한다. 등단 이후의 삶과 시에 대해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참석료는 무료, 참가 문의는 문학수첩 인스타그램(@moonhaksoochub)을 참조하면 된다.
문학수첩 2025.상반기
문학수첩 편집부 (지은이),
문학수첩, 2025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문예 창작을 전공해 유독 '시'감성이 충만한 사람. 매일 쓰고 다듬으며 살아간다. "내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 그 질문이 나를 살게 한다. 언젠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공유하기
거실 책상서 쓴 시로 등단한 주부... "시 쓰는 건 내 방 갖는 일"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