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프놈펜의 뚜올슬랭 박물관 원래 고등학교였던 이 건물은 1975년부터 S-21 수용소로 사용됐다. 사진은 고문과 자백, 집단 수용이 벌어졌던 건물 외벽의 현재 모습이다.
코이카 캄보디아사무소
행 관장에 따르면, 1983년 말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은 5월 20일을 '분노 유지의 날'로 지정하고, 다음 해 뚜올슬랭 박물관에서 첫 기념식을 열었다. 이후 34년이 지난 2018년, 크메르 루주를 단죄한 캄보디아 특별재판소의 권고에 따라 이 날의 명칭은 '추모의 날(Day of Remembrance)'로 변경됐다. '분노를 유지하자'는 구호는, 시간이 지나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말자'는 성찰과 경고의 메시지로 바뀐 것이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75년 4월에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급진 공산주의 무장 세력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시작됐다.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다며 도시를 비우고 지식인, 종교인, 장애인, 소수민족 등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불과 4년 만에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인 170만 명 이상이 학살과 기아, 강제노동으로 사망했다.
뚜올슬랭 박물관은 원래 평범한 고등학교였으나, 1975년 전국 200여 개 수용소 중 하나인 'S-21 수용소'로 전환됐다. 웃음이 넘쳤던 교실은 고문실이 되었고, 분필은 채찍으로, 칠판은 자백서로 바뀌었다.
행 관장은 "1979년 1월,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이곳을 거쳐 간 약 2만 명 중 생존자는 12명이었다"며 "성인 8명, 어린이 4명뿐이었다. 그 참혹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건물 외벽에는 여전히 철조망이 감겨 있고, 땅에는 피로 얼룩진 흔적이 남아 있다. 자살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감방, 그리고 지금도 문틈마다 배어 있는 절규. 잔혹함은 벽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행 관장은 "이곳은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애도의 공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두 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될 교훈의 장이다"라며 "매년 40만~50만 명이 이곳을 찾고, 그중 80%는 외국인이다. 낯선 나라의 학살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 이 아픔이 더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기억을 지키는 힘
박물관은 최근 유네스코와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와 함께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코이카는 단순한 기술 지원자에 머물지 않았다. 전쟁과 폭력으로 사라진 기록을 복원하고, 그 기억을 세상이 잊지 않도록 디지털에 새겼다.
2014년부터 7년에 걸쳐 수감자 전기, 자백서, 사진, 선전물 등 약 75만 건의 자료를 보존하고, 50만여 건을 디지털화해 크메르어와 영어로 공개했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구축된 이 기록은 단순한 이미지 파일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목소리이자 역사의 증언이다.
행 니사이 관장은 "박물관에 보존된 수많은 문서들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고, 특히 종이 자료들의 보존이 시급했다"며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완료됐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회상했다. 그의 말처럼, 이 기록들은 단순히 과거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자들의 목소리이자, 침묵 위에 세워진 역사의 증언이다.
종이 한 장이 가족을 찾아준다

▲투올슬랭 박물관 아카이브 복원실에서 진행 중인 문서 보존 작업
코이카 캄보디아사무소
"혹시 여기, 우리 아버지 이름이 있을까요?"
"이 문서에 적힌 이 사람이, 제 어머니일지도 모릅니다."
이름도 사진도 없이 사라진 이들을 향해, 유족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이름도 사진도 없이 사라진 이들을 향해, 단서 하나 없는 유족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속 한 줄의 기록이, 누군가에겐 가족의 생사로 이어지는 유일한 끈이다.
그는 "2016년까지만 해도 가족을 찾는 문의는 거의 없었지만, 2024년엔 34건, 2025년 5월 현재까지 16건이 접수됐다"며 "연구자들의 열람 요청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디지털 아카이브는 단순한 보관이 아니다. 거짓이 진실을 덮기 쉬운 시대에,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살아 있게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교육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기억은 현재의 책임이다
5.18 민주항쟁 등 국가폭력을 경험한 우리에게 이 메시지는 결코 낯설지 않다. 전쟁과 내전, 정치적 폭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지난달, 한국의 또 다른 국가폭력 피해 사건인 제주 4.3 사건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 남긴 증언과, 진실을 밝히기 위한 유족들의 오랜 노력이 국제사회로부터 그 역사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현재 뚜올슬랭 박물관은 2차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 중이며, 쩡아익 집단학살터와 M-13 수용소 등을 포함한 캄보디아 추모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코이카와 함께 추진하고 있다.
뚜올슬랭 박물관은 이제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이 아니다. 다시 떠올리기 힘든 아픔일지라도, 우리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분노의 날'은 캄보디아의 상처를 넘어, 인류 모두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경고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전 세계 시민의 약속, 그 다짐은 지금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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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4년, 사라진 2만 명... 한국이 되살린 학살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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