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근무했던 모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실내화를 신게 했다. 그런데 그 어느 학교도 학생들이 실내화를 잘 신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이준만
1989년에 지방 소도시의 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2024년에 같은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퇴직했다.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일곱 곳의 학교에서 근무를 했는데, 단 한 군데 예외 없이 학교 안에서는 실내화를 신게 했다. 실외화와 실내화를 구분해서 신게 했다는 말이다.
실내에서 실내화를 신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청결과 건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교실이 훨씬 깨끗해질 테고 먼지도 덜 발생해 학생들 건강에도 더 나을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실외화를 실내화로 바꿔 신어야 하는 일 층 현관에 학생들이 사용할 신발장이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근무한 일곱 군데의 학교 중 학생용 신발장이 일 층 현관에 설치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신발장은 학생들의 교실 앞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일 층 현관에서 실외화를 벗어서 손에 쥔 채 맨발로 자신의 교실까지 걸어가야만 비로소 실내화로 갈아 신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외화를 손에 쥔 채 자신의 교실까지 맨발로 걸어가기를 즐길 학생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학생들의 양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실외화를 손에 들고 맨발로 교실까지 걸어간다. 이런 학생들이 가장 많다. 둘째는 실외화를 신은 채 교실까지 걸어간다. 이런 경우는 교사들의 눈에 띄어 제지당하기 일쑤이다. 세 번째는 아예 등교할 때 실내화를 신고 온다. 물론 이런 경우도 교사들의 눈에 띄면 제지당한다. 네 번째는 실내화를 신발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등교한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그야말로 드물고 드문 경우이다.
결국 학생들 대부분은 일 층 현관에서 실외화를 벗어 손에 든 채, 양말바람으로 자신의 교실까지 가게 된다. 추운 겨울에 양말바람으로 종종걸음 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학생들이 교실로 향하는 그 길이, 양말바람으로 주저 없이 디딜 정도로 청결했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도 양말바람으로 교실로 향하고 싶진 않았으리라. 실외화를 신고 교실까지 가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랬다가 교사들의 눈에 띄면 혼이 나고 벌점을 받게 되니 감히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학생들을 벌주는 게 꺼림칙했던 나는 학교 안에서는 좀처럼 학생들의 발치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학생 생활지도에 소홀한 교사라는 평가를 심심치 않게 받았다.
그런데 단 한 학교도 예외 없이 교사들의 신발장은 일 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교사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 층에서 실외화를 실내화로 갈아 신을 수 있었다. 만약 학생들의 신발장을 일 층 어딘가에 설치할 수 있다면 학생들이 양말바람으로 교실로 향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2008년께 학교에 학생들의 신발장 설치를 건의한 적이 있다. 단박에 거부되었다. 예산도 없고 설치할 적당한 장소도 없으며 신발 도난의 위험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다음 해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교장이 바뀌었는데 갑자기 일 층에 학생 신발장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없다던 예산이야 어찌어찌 확보했다손 치더라도, 설치 공간은 갑자기 어디서 생겨났으며 신발 도난의 위험은 없어졌다는 말인가.
말머리가 길어졌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일을 요구할 때, 학생들이 그 요구를 자연스럽게 지킬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지 않은 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야간 자율학습도 실내화 신기와 비슷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학생들이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은 채, 학교에서는 야간 자율학습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며 학생들의 참여를 강제했다. 이런 상황이 주는 부조리함을 느껴 교직 생활 동안 내가 담임을 맡은 학생들에게 자율학습 참여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맡은 반의 자율학습 참여율은 상대적으로 낮았고 그로 인해 학교 관리자들한테서 질타도 많이 받았다.
교직을 떠난 지금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학생들에게 일 층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자율학습 참여의 자율성을 주는 일은 마땅하고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땅하고도 옳은 일을 하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을 학교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리라.
2020년 전후로 약간의 상황 변화가 있기는 했다. 야간 자율학습은 학생들의 순수 희망으로 바뀌었고 학생들은 실외화를 신고 실내화가 있는 자기 교실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학생들은 가르치고 통제해야 하는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학생들은 자신들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에 의사를 피력하기기 매우 어려웠다.
학교의 시스템이 이러하다 보니 학생들은 학교생활을 하면서 민주적 의사결정의 경험을 쌓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결정한 대로 묵묵히 따르는 학생이 좋은 학생, 착한 학생으로 치부되었다.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토대가 아예 없는 셈이었다. 현직에 있는 후배 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고 하고, 그런 상황이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교사들도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런 형편이니 우리나라 사람이 비판적 사고를 지닌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하려면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학교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비판적 사고력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학교 교육의 틀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아 매우 안타깝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30년 넘게 지방 소도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 2년을 제외하고 일반계고등학교에서 근무.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