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속 주인공이 마주한 남녀의 이야기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을 만큼 엉망진창이다. 1946년생 거구의 노인 지명수는 뇌경색으로 편마비에 고혈압, 당뇨병, 심지어 치매초기 증상까지 겪고 있는 가난한 노인이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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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요양보호사인 주인공이 명수와 지연의 삶 가운데 들어서 일하는 과정을 1인칭 주인공시점에서 서술한다. 지연과의 미묘한 기싸움부터, 도통 적응되지 않는 이들의 삶에 적응해나가는 과정, 조금씩 흐려지는 요양보호사와 수급자, 피보호자 사이의 경계까지가 피부에 와서 닿는 일상적 사건들을 통해 묘사된다. 배운 이의 이성적 시선으로, 그러나 현장의 냄새를 그대로 맡는 노동자의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주인공은 명수와 지연의 삶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여럿이다. 그중 하나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지연에게 진료를 받고 필요한 처방약을 얻어주려 했던 순간이다. 보건소 의사에게 부탁해 어렵게 마련한 자리, 지연은 진료소에서 의사와 마주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튕기듯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의사가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았다면서요?"하고 물은 직후였다.
국민, 그 집단의 테두리에 속하지 않은 여자의 심경을 주인공도, 의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의 관심을 받아본 일 없는 들개처럼 아무렇게나 이빨을 드러내고 도망쳐버리는 지연의 마음을 그녀가 아닌 누가 안다 할 수 있을까.
소설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인상적 문장으로 형상화한다. 주인공이 지연과 관계를 개선하려 한글을 가르치려 했던 때다. 공책과 연필을 사다 주고 딱 이틀을 교육했는데, 처음엔 좋아하던 그녀가 더는 배우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다. 소설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갈무리한다.
'혹 내 어떤 태도나 표정 때문에 그만둔 걸까'를 여러 번 되돌려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처지가 다르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 많다. -50p
집 안 구역질나는 지하실 발견한 것 같겠지만
<창신동 여자>는 하루이틀 출퇴근길 동안 읽어낼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지만, 동시에 읽어내기 어려운 무거운 작품이기도 하다. 더럽고 불쾌한 환경뿐 아니라 너절한 쌍욕이 넘실대고 감수성 높은 독자에겐 버거울 성적 묘사, 인간과 사회의 깊은 어두움을 구태여 건드리는 시선 등이 하나하나 그러하다.
소설이 단 한 줄 적고 있는 문제로도 책 한 권이 거뜬히 나올 듯한 순간도 적지 않다. 최현숙이 과감한 결단으로 적을 것과 적지 않을 것을 구분하며 거침없이 나아간 결과로써 단촐한 외양을 얻었을 뿐이다. 구술생애사인 저자의 역량을 한껏 펼쳐 소설이 아닌 취재기를 적었다면 100페이지가 아니라 1000페이지도 거뜬했을 테다(물론 읽는 이의 수는 페이지에 반비례했겠지만).
소설은 계단식으로 읽는 이에게 충격을 던진다. 그 열악한 현실, 사회적 외면, 구조화된 부조리, 좀처럼 긍정하기 어려운 사연, 너절하고 추레한 인간상 따위가 하나하나 까발려지는 동안, 독자는 내 집 안 구역질나는 지하실을 발견한 듯 문을 닫고 영영 다시 열고 싶지 않은 충동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답일까.
책을 읽는 일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효과적 수단이란 점이다. 인간은 익히 만나본 적도, 들어본 적도, 그리하여 알지 못했던 세계의 실존을 책을 통해 접한다. 그로부터 생각하고 공감하며 이해하게 된다. 그를 대하는 입장과 태도를 정립한다. 그 하나하나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윤리와 떨어져 있지 않다.
방 안으로 한 치도 들어서려 하지 않았던 사회복지사들, 그보다 못한 자세가 내 안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똥을 지린 명수를 못 본 척 외면하던 주인공의 모습이 실은 그대로 나의 모습이란 사실도 인정할 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창신동 여자>가 내게 유익한 작품이 되었단 게 신선하다. 처지가 다르면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단 건 그대로 진실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영영 다가설 수 없다는 뜻은 아니리라. 곰팡이 가득한 지하실 문을 여는 용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런 자세가 아니겠나. 최현숙의 글이 그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님을 나는 이제야 똑똑히 알겠다.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나와 같기를 바란다.
창신동 여자
최현숙 (지은이),
위즈덤하우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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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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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읽기 민망했던 책, 덮고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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