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 산문 <허송세월> 나남
교보문고
"구강의 기능이 퇴화해서 음식을 삼킬 때 식도로 들어가지 않고 기도로 들어가서 사레들리기를 자주 하고, 혀의 기능이 둔화되어서 어눌하게 된다고 의사들이 말했다. 이것도 자연현상이라는데, 혀를 빨리 놀리지 않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혀가 굼뜨게 되면 말이 멀어지고, 단어 한 개를 끌어오려 해도 단어는 선뜻 따라오지 않아서 단어 하나가 모시기 어려운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62쪽 (보내기와 가기)
이 부분을 읽는데 '어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란 안도감이 내 어깨를 감싸는 듯했다.
나이 드니 잦은 사레들리기와 어눌한 발음 때문에 스스로 겸연쩍을 때가 적지 않다.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 여러 정황을 끌어와 보지만 결국엔 실패하여 갑갑할 때도 있다.
이런 상태를 두고 저자는 혀를 빨리 놀리지 않게 돼 '오히려 좋다'고 말한다. 혀가 느려지는 건 말의 무게를 배우는 과정이라 여기면 되고, 그로 인해 언어를 대하는 태도가 신중해지니 '좋은 일' 아니냐는 것이다.
혀가 굼뜬 현상을 답답함에 가둘 게 아니라 언어의 가벼움을 경계하기 위한 경로쯤에 둔다면 저자가 말하듯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겨우 떠올린 단어 하나가 더 깊고 진실하다는 뜻일 테니까.
쓰는 이와 쓰고 싶은 이에게 도움이 될 조언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주어와 동사의 거리가 멀면 그 사이의 공간에 한바탕의 세상을 차려 놓을 수 있지만 이 공간을 잘 운영하려면 글 쓰는 자의 몸에 조사들이 숨결처럼 붙어 있어야 하고, 동사의 힘이 문장 전체에 고루 뻗쳐 있어야 한다." 135쪽 (조사 '에'를 읽는다)
'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주어와 동사가 가까워야 바람직하다. 그래야 문장이 명확하여 독자가 읽기 쉽다. 주어와 동사가 멀어지면 중심 메시지가 흩어져 독자는 집중력을 잃기 십상'이라는 노련한 작가의 조언.
문장의 질서와 흐름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 거리를 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쓰는 이와 쓰고 싶은 이가 곱씹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되었다.
"'사람에게는 자기 사정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걸 들어주고, 거기에 공감하고, 함께 기뻐하고, 걱정해 주면 그것으로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다. 면담의 내용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킨다'라고 두봉 주교는 말했다." 268쪽 (주교님의 웃음소리)
우리가 사는 지금을 흔히 진심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이 말은 곧 듣는 어른이 부재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어른은 가르치고 훈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감하며 들어주는 사람이다. 저자는 두봉 주교의 웃음소리가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귀와 같다고 말한다. 상대가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귀야말로 진짜 어른의 귀다.
지난달 10일 선종한 두봉 주교(유림의 본향 안동에서 20년 이상 교구장을 지낸 벽안의 원로 사제)는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된 종교계 어른이자 어른다움의 표본이었다.

▲ 생전에 주민과 윷놀이 중인 두봉 주교. 안동 MBC 창사특집 '한국인 두봉 주교' TV 화면 촬영
mbc
<허송세월>은 '나도 이런 감정일 때가 있었는데. 어쩜,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고 숨 돌릴 틈을 주는 책이다. '두려움은 어떻게 꺼내는 거지? 난 지금 무엇을 위해 버티는 걸까?' 묻고 싶은 사람에겐 대신 답해주는 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쓰는 이와 쓰고 싶은 사람에겐 마땅한 참고서가 될 <허송세월>.
자발적 '허송세월'을 선택하여 자기만의 속도와 중심을 찾아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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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네, '허송세월' 중인데 충만함으로 가득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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