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고도, 복직도, 출근 시간도 모두 원청이 정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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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로레알그룹은 삼경무역에 인원 감축을 지시했고, 삼경무역은 신주리씨를 포함해 40~50명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했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이 왔다. 한 자리가 비었다며, 사직서를 없던 일로 하겠다는 통보였다.
해고도, 복직도, 출근 시간도 모두 원청이 정했다.
"하청업체 직원들은 영업점에 밉보일까, 로레알(원청)에 밉보일까, 회사에 밉보일까 여기저기 눈치 봐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160쪽)"
신주리씨는 결국 롯데백화점 앞에 섰다. 팻말에는 '집단교섭에 응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불안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말할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사람들의 고통
소부즈(가명)씨는 경기도 포천 한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과장에게 반복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욕설을 듣고, 휴게시간이 아닌 때에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면 뺨을 맞았다. 과장은 쇠 연장을 던지기도 했다. 공장 내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과장은 사장의 처남이었다.
보다 못한 한국인 반장이 사장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건 반장의 해고였다. 이후에도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소부즈씨 역시 신고하지 않았다. 고용주의 서명이 없으면 다른 사업장으로 옮길 수 없었고, 재입국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사장에게 밉보이면 그 사인을 못 받을까봐, 폭행을 당하고도 신고 안 합니다(262쪽)"
고용허가제(E-9 비자) 아래, 소부즈씨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자유롭게 말할 수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는 고통을 기록하며 익명을 요청했다. 이 고발이 보복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피부색이 좀 검다고 모욕을 당하고 동물 취급을 받곤 했습니다. 그는 너희들은 동물 같다고 말했습니다. 원숭이처럼 보인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차별적 모욕은 물리적인 폭력이나 고문보다 더 나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260쪽, <나는 매일 밤 울었다> 중에서)
38일 만에 인정된 가장의 죽음

▲ 출판사 측이 만든 카드뉴스 중 일부
출판사 플레이아데스
고 마채진씨는 한국건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하청업체 사장의 지시로 2023년 6월 11일,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그날 그는 1.2톤 리프트에 깔려 사망했다. 사고 발생 후 2시간 동안,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전관리자는 없었고, 2인 1조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가장 큰 문제는 안전관리자의 부재와 2인 1조 원칙 무시, 즉 그곳에 아빠(고 마채진씨) 혼자였다는 점이었다(59쪽)."
그는 두 딸의 아버지였다. 식사 자리에서 술 한잔할 때마다 딸들은 애정 어린 핀잔을 하곤 했다.
유족은 한 달이 지나도록 회사로부터 사과나 설명을 받지 못했다. 두 딸은 출근 시간과 점심 시간마다 한국건설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와 언론 보도가 이어진 끝에, 사망 38일 만에 한국건설은 사과문을 게시했다.
"안전관리자가 사고 현장에 있었다면", "2인 1조로 일을 했다면". 딸 마혜진씨는 여전히 그날을 되짚는다.
"지금쯤 아빠가 손녀를 안아 볼 수 있지 않았을까(63쪽)."
그 질문은 오늘도 가족 곁에 남아 있다.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고, 공정한 조사와 함께 책임자를 합당하게 처벌해 달라 말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의 목적처럼 안전사고를 예방하자고 촉구하는 것은 절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안전한 노동환경 구축'이라는 공공의 가치를 위해 다 같이 투쟁한다면 이 세상은 분명히 어제보다는 조금 더 안전해질 것이다. 늘 그렇듯, 누구나 그렇듯,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63~64쪽, <연대하는 세상으로> 중)
불안, 고통, 죽음이 없는 안전한 일터
욕설과 폭행, 갑질과 해고가 난무하는 노동 현장의 민낯. <만국의 노동자여 글을 쓰자>에 실린 37개 사연은 이 현실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들이 기록하는 이유, "잊히지 않기 위해서."
그 기록 속엔 생산비 절감, 고강도 업무, 단축 공정 같은 익숙한 단어들이 반복된다. 책 속 '우리'는 묻는다. 왜 아직도 사람을 부품처럼 취급하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일터는 어디에 있는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일터'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써 내려간 이 기록은, 우리가 아직 잊지 않아야 할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현실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전하게 일하고 사람답게 일하는 세상, 그 시작은 잊지 않고 함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