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클레이션 피겨스> 1972/2011 16mm 필름을 비디오로 변환한 작품; 거울, 양면 프로젝션 스크린, 구겨진 신문지, 35분 42초
전사랑
전시장에 있으면 변기도(마르셀 뒤샹), 바나나도(마우리치오 카텔란), 바닥에 흩뿌려진 사탕도(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모두 작품이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에서 전시장에 흩뿌려진 사탕을 가져오긴 해 봤지만, 안소니 맥콜의 <서큘레이션 피겨스>처럼 작품을 밟아 본 경험은 없었다.
그런 관람객의 당황스러움을 포착해서인지, 전시는 '굳이' 신문지를 밟고 거울을 지나야 다음 작품으로 이동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안소니 맥콜의 작품은 관람객이 작품을 '보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관람객을 직접적으로 작품 안으로 초대한다.
일정 기간마다 새로운 신문지로 교체되는 작업인 만큼, 관람객의 발자국은 그의 작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불의 풍경>에서 불을 붙이는 사람들처럼, 관객은 그의 작품에 변화를 만들고 작품은 그제야 완성된다.
'관객 참여형' 설치미술이 1990년대에 들어 활발해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1970년에 처음 설치된 <서큘레이션 피겨스>는 시대적으로 앞서 나간 작품이다.
'찍고 찍히는' 시대
구겨진 신문지를 밟는 낯선 감각을 통과해 들어가면 1972년 퍼포먼스 영상을 마주하게 된다. 안소니 맥콜은 런던에서 15명의 사진작가와 영화제작자들을 초대했다. 사진작가와 영화제작자. 아마 1970년대 사진기를 항상 들고 다니는 유일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 Circulation Figures, 197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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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와 잡지가 구겨져 흩뿌려진 바닥, 양면에 설치된 거울이 있는 공간으로 초대된 사진작가와 영화제작자들은 서로 찍고 찍히기를 요구받는다.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이 아닌, 동료들을,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마도 런던에서 예술을 하는 서로 아는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을 터. 참여한 사람 모두 이 퍼포먼스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사진 찍는 모습을 또 찍고, 찍힌다. 관람객에 입장에서도 거울 사이를 걸어 다니며 자신의 모습을 찍으면서 이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이제는 사진작가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사진을 찍고, 찍히는 시대가 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의 생성.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의 반영과 무한하게 반복되는 과정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매번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어떻게 될까. 전시장에 밟히는 신문지처럼, 언젠가는 그렇게 폐기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이미지는 어느새 우리의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소니 맥콜은 모두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생산하는 현재를 1970년대에 예견한 것일까. "그는 시대를 만들고 우리는 이제야 도착했다"는 전시 설명이 납득이 간다.
기술보다 앞서간 아이디어
어두운 방에 프로젝터를 쏘아서 완성시킨 안소니 맥콜의 '빛 조각' 작품은 1973년에 <원뿔을 묘사하는 선>(Line Describing a Cone)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탄생했다. 1973년 다락방 안에서 프로젝터가 벽에 빛의 점을 쏘는 이 작품은 그 방이 먼지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기에 안소니 맥콜이 의도했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 Line Describing a Cone (1973) Tate ⓒ Anthony McCall, courtesy Sean Kelly Gallery, New York
이미지제공: 푸투라 서울
그러나 이 작품이 스웨덴의 쿤스트 할 갤러리에 전시되었을 때는 공기가 너무 깨끗한 나머지 공기 속 '빛줄기'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깨끗한 공기가 '빛의 조각'을 창조하지는 못했던 것. 2024년 아트넷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때 이 작품의 매체가 빛이 아니라 안개와 먼지, 연기, 연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발전이 필요했다. 안소니 맥콜은 설치 작품 제작을 멈췄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해이즈 머신(연무기)이 개발되었다. 연무기는 인공 안개 생성 장치로, 공기 중에 아주 미세한 입자를 분사해 빛의 경로를 시각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연무기와 디지털 프로젝션 기술이 안소니 맥콜의 오랜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그는 2000년대 기술 발전에 힘입어 디지털 프로젝션 기술을 활용해 컴퓨터로 생산한 '선 드로잉'을 벽에 투사하고, 설치 공간에는 연무기(해이즈 머신)를 사용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관객이 작품이 되는 순간
그렇게 20년이 넘는 공백기를 뛰어 넘어 완성된 작품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당신과 나 사이>(2006), 그리고 <스카이라이트>(2020)이다.
관객들은 일상생활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간다. 마치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과 같지만, 영화처럼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몰입적 환경에 최적화된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관람자들은 작품을 '관람'하기보다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의 구성요소가 된다.

▲ Skyligh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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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저 멀리 높이, 달이 떠 있는 듯하다. 분사되는 안개는 밤공기와 바람처럼 느껴진다. 프로젝션은 고요히, 땅을 비춘다. 빛이 비치는 자리의 안과 밖은 공간을 나누지만 폐쇄적이지 않다. 빛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관객은 빛과 어둠, 그림자를 온 존재로 인식한다.
<스카이라이트>에는 자연을 모티프로 한 천둥과 번개음으로 이루어진 사운드가 추가 되어 있다. 다양하고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자연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숲속을 걷다 매섭지 않은 천둥 번개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 <당신과 나 사이>를 감상중인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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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사이> 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 속에서 거닐다 보면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을 몸소 느끼게 된다. 두 개의 디지털 프로젝션으로 구성된 이 작품 안에서 관람객들은 서로를 의식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을 바라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개개인의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작품 속 서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관객과 관객 사이 상호작용이 일어나기는 현대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럼에도 <당신과 나 사이>에서 유난히 오래 시간을 보내던 관객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 보았다. "기사에 쓸 건데, 사진 찍어도 될까요?"
지인을 대동한 전시 외에는 다른 관객을 찍은 적은 없었고 말을 걸어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랬더니 놀랍고도 재미있는 반응이 되돌아왔다. "제가 어떤 포즈를 취해 드릴까요?"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해제되고 '상호작용'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 <당신과 나 사이> 2006. 2개의 디지털 비디오 프로젝션, 헤이즈 머신, 32분, 반복 상영
전사랑
실제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아주 오랜 기간 머물렀다. 작품이 신기해서 바라보고 손을 뻗어 보는 사람, 서로를 사진 찍는 사람, 그리고 공간이 주는 숭고함과 몰입적 환경에 취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 그리고 그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안소니 맥콜의 예술적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작품 안에서 개개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작품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고요하고, 사색적이며, 타인에 대한 경계가 잠시나마 해제되는 안소니 맥콜의 신비한 예술세계를 경험해보길 추천한다.
전시는 9월 7일까지.
입장료 일반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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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을 공부하러 영국에 갔다 미술에 빠져서 돌아왔다. 이후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에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srjun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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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관객들 "이거 밟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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