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보행로(Public Footpath) 이정표, 사유지임에도 땅주인은 일반인의 보행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김성수
뿌리는 앵글로색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민과 장사꾼, 연인들이 밟아 다닌 소박한 길들이었다. 마을과 교회, 시장, 술집(네, 특히 술집)을 오가며 만들어진 길들.
그러던 중 18세기 '인클로저 운동', 귀족들이 "이건 내 땅이야. 다 꺼져"라며 울타리를 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거기서 분노한 보통 사람들, 드디어 들고 일어났다.
1932년, 영국 도보 애호가들은 국립공원 픽크 디스트릭(Peak District)의 카인더 스카우트(Kinder Scout) 산에 '집단 무단침입(Mass Trespass)'을 감행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땅은 귀족 것일지 몰라도, 길은 모두의 것!" 이라고 외쳤다.
그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1949년 '국립공원 및 시골 접근법(National Parks and Access to the Countryside Act)'이 제정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영국에는 약 22만 5천 킬로미터의 공공보행로가 존재한다. 지구를 다섯 바퀴 반 돌 수 있는 거리다.
"잔디밭이 왜 길이죠?"
"그건 당신이 오늘 첫 번째라서 그래요."
영국 시골을 걷다 보면, 갑자기 '개 조심' 표지판 옆에 "공공보행로(Public Footpath)"라는 표지가 나온다
길이 어디 있냐고? 없다. 그냥 잔디밭이다. 사유지를 가로지르는 경우도 많다. 어떤 농장에는 "문 꼭 닫고 가세요"라는 귀여운 문구가, 어떤 목장에서는 양들이 길을 막고 멍하니 인간들을 바라본다.
나는 종종 "이건 인간이 다닐 길이 아닌데…" 하는 양들의 눈빛을 느낀다. 그렇다고 멈추면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중세 농부와 현대 펀드매니저가 만나는 길
이 길은 천 년 전 농부가 당나귀 끌고 밟던 그 길이고, 지금은 런던 금융가 펀드매니저가 조깅화 신고 뛰는 길이다.
중세 농부는 생계를 위해 걸었고, 현대인은 다이어트를 위해 걷는다. 이것 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길은 교회 첨탑을 보고 만들었다. "저 첨탑 보이지? 거기 가면 시장이 열려." 그래서 지금도 '교회길(Church Lane)', '시장길(Market Street)' 같은 이름이 남아 있다.
영국인의 실용정신, 이런 데서 빛난다. '꽃 길' 대신 '시장가는 길' 이다.
걷기 철학, 영국인의 정체성
영국인에게 걷기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명상이고 치유며, 공동체의 문화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등산복을 꺼내 입고 '산책' 을 나서고, BBC에서는 걷기 다큐를 만들고, 코로나 팬데믹 때조차 공공보행로 만큼은 '열려' 있었다.
운전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대상도 보행자가 아니라, 보행자의 권리다. 이쯤 되면 "걷기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주야, 흙길 걸을래?

▲ 노란색기둥은 공공보행로(Public Footpath) 이정표, 사유지임에도 땅주인은 일반인의 보행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김성수
우리 아이들은 이 길을 걸으며 자랐고, 지금은 다 어른이 되어 저마다의 인생을 걷고 있다. 아직 손주는 없지만, 언젠가 그 아이와 함께 이 공공보행로를 걸을 날을 상상한다.
"이 길은 누구 것도 아니고, 모두의 거란다. 그러니 마음껏 걸어 보렴. 단, 양 들어오지 않게 문은 꼭 닫고 나와야지."
우리에게도 이런 길이 필요하다.
한국에선 '여긴 내 땅이니까 지나가지 마시오'가 아직도 통용된다. 하지만 길은 원래 사람이 다니라고 있는 것이다. 길은 연결이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 세대와 세대를 잇는 것이 길이다. 박물관 속 유물보다 더 살아있는 문화유산, 그게 바로 영국의 공공보행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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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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