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의 겉표지
장준하기념사업회
해방 후 장준하가 맞은(겪은) 정국은 예측불허의 변혁이었다.
김구 주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서기를 지내고, 이범석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에 참가하여 중앙분련소 교무처장을 맡았다. 이범석의 노선에 반감이 생겨 그만두고, 1949년 2월 못다한 공부를 더 하고자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여 6월에 졸업했다. 이 무렵 백범이 이승만 수족들에게 암살당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겪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문교부 국민정신 계몽 당상관이 되어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획·서무과장과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52년 9월, 국민사상연구원의 지원으로 피난 수도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을 발간했다. 발행인은 이교승이고 그는 편집책임을 맡았다. 이해 12월에 4호까지 발간한 후 재정문제로 중단되었다.
장준하는 고민을 거듭했다. 전시에 피난지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생존형 고민'에서부터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실존형 고민'이 겹쳤다. 점점 고약해지는 이승만의 폭정을 견제하고, 지식인과 청년학도들의 이념적 사상적 등불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스스로 가장 잘 할 수 있고 적성에 맞는 일이 있었다. 잡지를 내는 것이다. 중국 광복군 시절에 <등불>과 <제단>, 해방 후 <사상>을 발간하면서 어느 정도 노하우도 쌓였다.
<사상계>는 장준하가 '독립운동을 하는 자세'로 만든 월간 교양잡지다. 그는 1950년 <사상계>를 창간하여 '사상계헌장'을 제정하여 매호 권두에 실었다. 모든 자유의 적을 쳐부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 다시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민권투쟁의 전위가 될 것임을 다짐했다.
장준하는 1953년 피난수도 부산에서 이 잡지를 시작했다.
한 때 '한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문화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학업을 계속하고자 미국 유학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가족의 부양 등 생계 문제로 뜻을 접어야 했다.
장준하에게는 <사상>의 종간이 <사상계> 창간의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몸담았던 국민사상연구원에 사직서를 내고 새 잡지의 창간에 나섰다. <사상> 제5권에 싣기 위해 모아둔 원고뭉치를 들고 혼자서 허허벌판으로 나왔다.
여기서 '벌판'이란 용어를 썼지만, 1953년 한국의 상황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4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단독북진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6월 18일에는 반공포로 2만 5,000여 명을 석방했다. 이에 앞서 2월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원을 환으로 100대 1로 평가절하했다. 7월에는 한국정부가 불참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8월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연합신문·동양통신 편집국장 정국은이 정부전복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전국토가 허허벌판이었다. 전란으로 수백 만 명의 국민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가족이 이산되고, 가산이 불타고,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벌판'은 장준하가 장정 6천리의 고행길을 걷던 그런 벌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교장에서 모셨던 김구는 암살되어 '불온'의 대상으로 낙인되고, 그 시기 지켜보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전난을 막지 못한 채 부산에 피난 와서도 권력놀음에 영일이 없었다.
6·25전쟁 중인 1952년 여름, 이대통령은 부산에서 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개헌을 강행했다. 6·25전쟁 중 터져 나온 행정상의 무능, 부정부패,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민간인학살사건 등은 이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켜 다가오는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연임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당선이 불가능함을 알고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국민회·족청·대한청년단·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부추기고 정치깡패 집단인 백골단·땃벌떼·민족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벽보와 비라가 부산 일대를 뒤덮었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장관, 원용덕을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임명하여 야당의원들을 체포하여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전란 중에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재집권하였다. 이때 개헌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 이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이범석은 자유당의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 이승만은 이범석의 족청계가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도중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런닝메이트로 지지하여 당선시키고 이범석의 족청계를 숙청했다. 그리고 1953년 봄, 휴전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김구 암살, 이승만의 집권과 횡포, 이범석의 일그러진 정치행각을 목도하면서 정치에 많은 비애를 느끼고,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사상계>의 창간을 서둘렀다. 허허벌판에서 시작한 또 한 번의 모험이었다.
장준하는 '모험'에 강한 편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거나 어려웠던 일을 모험심으로 헤쳐나가고 이를 극복해 왔다. 다시 모험에 들어갔다. 백낙준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이승만정부에서 문교부장관을 지내다가 개각으로 물러나 있었다.
<사상>을 발행할 때 국민정신연구원이 문교부 산하에 있었던 관계로 몇 차례 만나 뵈었던 처지였다. 장준하의 새 잡지 창간 계획을 들은 백낙준은 퍽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하고 얼마간의 용전(用錢)까지 주면서 격려했다. 이 '얼마간의 용전'이 장준하가 새 잡지를 준비하면서 갖게 된 자금의 전부였다.
장준하는 창간호의 준비를 서둘렀다. 처음에는 <사상>지의 속간 정도로 구상하고 있었다. 앉아서 원고를 정리할 사무실도 없어서 다방을 전전하면서 원고를 청탁하고 편집을 했다. 알고 지내는 몇몇 학자·교수들에게 새로 원고를 청탁하면서 원고료는 책을 팔아서 주겠다고 사정을 말했다. 필자들 중에는 당신의 뜻이 기특하니 원고를 써서 주겠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원고가 모아지면서 발행인 명의를 바꾸는 일이 시급했다. 하지만 전 <사상>지 발행인은 그 동안 손실 비용 3천만 원 (제1차 화폐개혁 전의 금액)을 권리금으로 주지 않으면 명의변경을 해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여러 차례 찾아가 읍소를 하고 백낙준이 전 비서관을 보내어 설득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반품된 <사상>지를 거리에서 덤핑으로 판매했다. 어렵게 원고를 모으고 조판을 시켜놓고 있는 터에 명의변경의 문제가 새로운 난관으로 등장했다.
몇몇 친구들과 의논한 끝에 정태섭 (당시 연세대 교무처장)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놨다 '사상'에다 '계'자를 하나 더 붙여 지명(誌名)을 '사상계(思想界)'로 하라는 것이다. 한국 지성의 상징이 된 <사상계>의 제호는 이렇게 하여 탄생되었다. <사상계>라는 지명을 달고 보니 <사상>보다는 부드러워 보이고 또한 종합잡지로서 편집의 폭을 얼마든지 넓힐 수 있는 이름이라고 믿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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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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