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5.05.30 10:52수정 2025.05.30 10:5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뛰어간다. 그 뒤를 여학생들이 무성한 그늘 사이로 쪼개진 햇살을 밟으며 천천히 걷는다. 언뜻언뜻 고개를 돌려 끝없이 이어지는 초록빛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한층 더 환해진 길 위에서 싱그러움이 또 다른 싱그러움을 내려다보는 듯한 순간이다.
며칠 전부터 아파트 단지 산책로를 걸을 때면 자꾸 길 가장자리에 눈이 간다. 작년 늦가을, 시에서 산책로를 재정비한 일이 떠오른다. 길 중앙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던 구조물들을 걷어낸 대신, 가장자리를 따라 수국을 심었다. 그때 맨흙 위에 조심스레 옮겨 심긴 묘목들을 보았다.
손바닥만 한 모종들이라 겨울을 무사히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한편에 꽂아둔 이름표를 들여다보며, 색색의 꽃이 수줍게 고개를 들고 푸른 잎 사이로 햇살이 번지는 풍경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 햇살 아래 기억이 피어나길 바랐던 순간이었다. 요즘 내가 기다리는 여름의 한 장면이다.
봄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다. 싸늘하다가도 문득 선선하고, 한낮엔 여름처럼 덥기도 하다. 그렇게 널뛰던 기온이 이제 여름으로 기운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의 걸음을 살피면 알 수 있다.
오늘은 유독 할머니들의 구름 같은 걸음이 눈에 들어온다. 무심한 듯 차분하게, 나무와 들꽃에 시선을 옮기며 걷는 걸음 속에는 계절이 담겨 있다. 벤치에 앉아 쉬고 있던 두 분이 수국잎을 손바닥으로 쓸며 중얼거린다.
"이것들 다 피면 얼마나 이쁠까."
그 말끝에 한 분이 열무김치를 맛있게 담갔다며 자랑을 덧붙인다.
아주 잠깐, 저분들은 수국을 보며 어떤 시절을 떠올릴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금은 잎만 무성하지만, 머지않아 연보라, 흰빛, 청보랏빛을 띤 꽃송이들이 하나둘 피어날 것이다. 햇살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바람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흔들 것이다. 나는 그 조용한 변화를 기다린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 산책길에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감각이 다시 깃든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이 길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이어지는 길목에 놓여 있다. 이른 아침이면 가방을 멘 아이들이 무리 지어 지나간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엄마 손에 끌려가기도 하고, 조금 느긋한 고등학생들은 체육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며 걷는다. 어떤 아이는 반쯤은 감긴 눈으로 꿈속을 걷듯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때때로 혼잣말처럼 짧은 웃음을 흘러나오게 한다.
아마 내가 이 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아침 때문일 것이다. 환경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종에 따라 꽃 모양이 달라지는 수국 모종처럼, 아이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피워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이 길의 여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요즘 나는 문득문득, 지금의 이 길이 내가 걸었던 오래전 길과 겹쳐진다. 내가 학교 가던 길은 시골의 신작로였다.
철마다 풍경이 바뀌는 그 길에서는 자동차보다 경운기가 더 익숙했고, 봄이면 청보리가 바람 따라 물결쳤다. 보리가 익어갈 무렵엔 아까시나무꽃 향기가 보리밭을 스치며 신작로에 머물렀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의 모든 돌멩이, 모든 나무가 기억에 자리잡은 기분이다. 그때는 집에서 학교로, 다시 집으로, 그 길 외에는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 그 길을 떠올리면 학창 시절의 전부가 거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간혹 아득한 미래를 기다렸던 곳이기도 했으려나.
그 길이 내 안으로 이어지면 그리워지는 것들이 많다.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길을 따라 함께 걷던 친구의 목소리, 순간의 냄새, 가볍게 머리카락을 날리던 바람, 빛의 감촉. 그 모든 것이 지금도 가슴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나의 과거와 현재가 지금도 그 길을 함께 걷는 셈이다.
그 시절에는 그런 감각들이 특별하지 않았다. 떨쳐버리고 싶을 만큼 지겨웠다. 그저 집에서 학교 사이, 매일 지나던 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평범한 길 위에서 마음의 결이 조용히 다듬어지고 있었다는 걸 알겠다. 바람은 마음의 주름을 펴주었고, 풀잎은 생각의 결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아이들이 학교 가는 이 산책로가 그런 '풍경의 기억'이 됐으면 한다. 지금은 무심히 지나칠지라도, 훗날 어떤 여름날 어딘가에서 수국을 마주쳤을 때 이 길을 떠올렸으면 한다.
함께 걷던 친구의 말투, 바닥에 반짝이던 빛, 머리에 내려앉은 그늘, 수국 위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간 벌 한 마리까지.
그런 기억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절묘한 순간에 천천히 살아난다. 그리고 따뜻하게도 하고, 풍요롭게도 한다.
요즘은 뭐든 빠르게 지나간다. 계절도, 뉴스도, 감정도. 하지만 꽃은 제 속도로 피고 진다. 특히 수국은 유난히 천천히, 또렷하게 피어난다. 그 느림이 좋다. 어느 초여름 햇살을 받으며 산책하는 할머니 걸음 같은 느림이 이 길을 걷는 내 마음을 다독여준다.
언젠가 한 아이가 무심히 수국 곁을 지나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기억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지금 이 길 위에 피어날 꽃 한 송이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먼 여름에서 문득 피어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피어나는 마음의 풍경 하나를 지나 걷는다.
기억은 늘 뒤늦게 피는 꽃, 바람 지난 자리.
빛의 그림자처럼 고요히 스며든다.
이 길 위의 수국 한 송이처럼,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머무는 풍경이 되기를.

완도신문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완도신문은 1990년 9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참 언론을 갈망하는 군민들의 뜻을 모아 창간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는 사훈을 창간정신으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의 길을 걷고 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