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의 겉표지
장준하기념사업회
함석헌은 필화사건의 와중에 감옥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라는 글을 <사상계> 9월호에 다시 썼다.
"나는 죽어도 사상이 강제를 당하고 싶지는 않다. 타협도 아니요 내 한 몸의 편리를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될수록 참을 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참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참 그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참은 완전한 마음의 자유에서만 될 수 있다."라고 '자유의지'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을 밝히었다.
함석헌은 구속되었을 때에 장준하를 신문하던 그 경찰관한테 구타를 당했다.
"함선생이 출감하신 후에 들은 얘기지만 나를 신문하던 바로 그 경찰관한테 구타를 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말단 경찰관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더욱 괘씸한 것은 계장이라고 하는 경찰간부에게도 구타를 당하신 것이다. 함선생은 그때 60노인이었다."
<사상계>는 창간 이래 학술지적 성격을 유지해왔다. 함석헌의 글을 계기로 시사비판적인 성격의 정론지로 바뀌었다.
장준하의 8월호의 권두언 '거족적인 각성을 촉구한다'는 내용도 권력의 비위에 거슬렸다. 장준하는 함석헌이 구속되어 있는 동안 세 차례나 시경 사찰과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검찰에 한번 소환되어 신문을 받았다. 검찰은 장준하가 함석헌과 짜고 정부를 공격했다는 내용의 조서를 꾸몄지만 기소하지는 않고 풀어주었다. <사상계>의 대내외적인 위상 때문이었다. '사상계필화사건'을 전후하여 장준하가 겪은 일이다.
책을 내놓고 열흘인가 쯤 후에 갑자기 함석헌 선생이 우리 <사상계>에 쓴 글 때문에 경찰에 붙들려 가셨다는 소식이 사(社)에 들려오더니 시경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 와서는 사에 남아있는 책을 조사하여 억류해 놓는 일방 나를 가자 하여 데리고 갔다. 그 때 내가 끌려간 곳은 남대문 근처에 있었던 곳으로 소위 '통일사'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건물이었다. 문 안에 들어서니 이방 저방에 업무부, 기획부, 상무실, 전무실 하는 표시가 눈에 띄어 무슨 상사회사 같은 위장을 한 기관임을 알게 되었다. 후에야 그것이 시경분실로 대공사찰을 전담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때 나를 취조하던 수사관은 무슨 경사라고 하는데 고약한 인상으로 끈질기게 묻기를 "당신네들 둘이(함석헌 선생과 필자) 공모해서 이런 글을 쓴 게 아니냐? 당신들은 빨갱이보다 나쁜 놈들이다."라고 전제하고 나의 권두언과 함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함께 상의해서 쓴 거라고 진술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함 영감에게 원고 청탁을 했고 또 그 원고를 분명히 읽고 나서 잡지에 게재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그 수사관은 나에게 따졌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했다. 수사관은 특히 그 대목을 강조하고 조서를 썼다. 그리고 그는 구체적으로 그 논문의 내용을 꼬집어내기 시작했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 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그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라는 말은 대한민국의 국체를 부인한 말이 아니냐? 대한민국의 국체를 부인하는 놈은 빨갱이 뿐이다. 너도 이 글을 읽어보고도 실었으니 똑같은 놈이라는 것이다. 또 "정부를 비판하기를 김일성 도당들이 비난하 듯 하지 않았는가?"라면서 몇 구절을 더 읽어 내려갔다.
하여튼 7, 8시간을 그렇게 시달리다가 그날은 구속되지 않고 나오고, 그 후 4, 5차 같은식의 환문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함선생이 수감된 서대문형무소까지 나를 끌고가서 함선생과의 대질신문을 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불구속으로 송치된 후 검찰에 한 번 소환 신문을 받는 것으로 끝났고 함선생도 기소요건을 갖출 수가 없었던지, 사회적 여론과 압력이 너무 컸던 때문인지 기소를 못하고 그냥 불기소인 채로 20일간의 고생을 당하신 끝에 석방되고 말았지만, 그때가 함선생은 일제 때부터 시작된 다섯 번째의 감옥살이라 하며 60노인으로서 폭행까지 당하시는 그 고초를 겪으신데 대하여는 나의 책임도 컸던 것을 나는 늘 죄송하게 생각하며 잊지 못하고 있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많은 양의 '권두언'을 썼다. 1955년도부터 50년대 말까지는 거의 기명으로 '권두언'을 집필하고, 주간이나 편집위원 중에서 장준하의 의도에 따라 대리 집필하기도 했다. 정국에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에는 장준하가 직접 쓰는 경우가 많았으며, 직접 쓴 '권두언'에는 장준하라는 필자를 반드시 밝혔다.
장준하의 기명 '권두언'은 뒷날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55년도부터 50년대 말까지는 장준하가 직접 기명으로 집필하였다. 60년대에 들어서는 편집위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장준하의 의도대로 대리집필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엔 집필자를 무기명으로 하여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사상계가 5.16 군사 정권과 극한대결 상태에 들어가고 난 뒤로는 사상계 주간이나 편집위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집필하되 장준하의 이름으로 게재한 예외적 경우가 없지 않다. 1965년도 겨울부터는 거의 편집실무의 책임자인 편집부장이 무기명으로 집필 게재하였다. 사상계 권두언 집필자는 엄격한 의미에서 (밝혀진 것만으로) 장준하·신상초·양호민·지명관·유경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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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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