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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정부 국토건설본부 책임 맡아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55] 이승만 독재가 망쳐놓은 경제를 살리는 일이 시급했다

등록 2025.06.12 15:05수정 2025.06.1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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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본회의에 출석, 연설을 하고있는 장면 총리. 1960.12.7.
국회 본회의에 출석, 연설을 하고있는 장면 총리. 1960.12.7. 연합뉴스

이승만 독재가 망쳐놓은 경제를 살리는 일이 시급했다.

장면 정권은 출범하면서 '경제 제1주의'를 천명하고 1961년을 '경제건설 출발의 해'로 설정하여 경제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 때 제시한 경제정책의 골자는 첫째, 국민정신의 혁명을 위한 국토건설사업의 시행, 둘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립이었다. 이 중에 국토건설사업은 국민대다수와 직접 관련된 사업으로 장면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역점 사업이었다.

새 정부는 국토건설사업을 통해 국민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심각한 실업자 구제의 방안으로는 이만한 정책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이 사업의 추진을 위해 국토건설본부를 설치하고 장면 국무총리가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장면 정부가 이 사업을 얼마나 비중있게 여겼는가를 '본부장=총리'의 조직에서도 알 수 있다. 장준하는 기획부장을 맡아 사업을 추진했다. 국토건설본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본부장 : 장면 국무총리
기획부장 : 장준하(사상계 사장)
관리부장 : 신응균(국방부차관보)
사회홍보부장 : 이만갑(서울대 교수)
기술부장 : 최경열(토목학자)
간사 : 유익형 박경수

국토건설본부의 인사는 국무총리를 제외하면 모두 장준하와 <사상계> 인맥이다. 명실상부하게 '사상계팀'이 정부의 핵심 국책사업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새 정부의 실력자가 된 재무장관 김영선의 적극적인 권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김영선 장관은 장준하의 능력과 비중, <사상계> 그룹의 역량을 익히 알기 때문에 총리에게 이를 추천했고, 마침내 일이 성사되었다.

장준하는 1961년 2월 초 서울대학교의 한 강연회에서 국토건설사업의 4가지 원칙을 밝혔다.

첫째, 국토건설을 하자면 국민 여론을 존중하여야 한다. 따라서 국민 여론에 따른 국민운 동을 전개할 것.


둘째, 원조 국가의 요구와 우리의 필요성이 일치되는 점만 종합적으로 취급한다. 즉 국가 이익에 부합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원조 물자를 재생산될 수 있는 사업에 쓸 것, 따라서 자손 만대에 부끄럽지 않은 사업을 이룩해 보자.


넷째,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업, 국민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사업 즉, 금년 내로 완성시키는 사업에 집중시켜보자.

장준하는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국토건설대를 설치했다. 사무직 1,614명, 기술직 452명의 요원을 선발하여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쳐 국토건설의 현장 지휘 감독역할을 맡겼다. 이들을 교육한 강사진은 장준하와 함석헌, 박종홍, 류달영 등 각계의 명사들이다. 이들은 정신, 사상교육을 통해 요원들을 정신무장 시켰다. 국토건설사업은 장면 정권이 짧은 기간에 추진한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서 장준하의 열정이 배인 사업이었다.

장준하가 국토건설본부를 운영하면서 직면한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이 사업을 일선에서 시행할 '요원'들의 처우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들의 신분문제 때문이었다. 국토건설요원들은 민주당정부가 새로 출범하는 시점에서 행정쇄신을 기하기 위하여 대학을 갖나온 졸업자 중에서 선발한 사람들이다. 공무원 신분이 아니고 아직 행정기관에 배치하기 전이기 때문에 이들의 신분이 애매했던 것이다. 대학졸업생이 귀한 시절이고, 4월혁명의 주역으로 자부해 온 이들은 기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반 행정직 관료들과는 의식이 달랐다.

그러한 동태(요원들의 동요-저자)를 알았는지, 장준하 기획부장은 서울대학교의 문리대 강당에서 있은 국토건설요원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요원들과 같이 빵조각을 저녁식사 대신 씹으면서 밤늦게까지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성심성의 소신을 피력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동요하여 이탈할까 생각했던 요원들도 마음을 돌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잡고 나라를 위해 한 번 일을 해보겠다고 다짐할 만큼 요원들간의 분위기가 일신되었다고 한다.(이만갑, '국토건설사업과 장준하선생')

"혁명적과업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행한다"는 민주당정부의 국정수행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12년 독재에서 풀려난 국민들은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시민 학생들에게 총질을 했던 공권력의 전위인 경찰은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민주당 구파에서 분당한 야당은 함께 반독재 투쟁을 하고서도 집권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감정까지 섞이면서, 장면 정권을 사사건건 집요하게 공격했다.

따라서 '혁명과업'은 지체되고 "데모로 날이 밝고 데모로 날이 저문" 혼란상이 이어졌다. 국민의 기대욕구는 충만했지만 현실적 여건은 이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불만이 켜켜이 쌓여갔다.

장준하는 이 기간 <사상계>의 일보다 국토건설사업에 더 열중했다. 그래서 제2공화국 9개월 동안 <사상계> 권두언을 3회 밖에 쓰지 못했다. 그만큼 '국토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장준하가 국토건설사업에 열정을 쏟고 있을 즈음인 1961년 11월호는 <사상계> 지령 100호가 된다. 하여 '지령 100호 기념호'로 제작했다. 주요 내용은 특집 '저널리즘과 사회적 진보', 함석헌의 '생각하는 갈대', 양호민의 '민주주의와 지도세력', 강원룡의 '회칠한 무덤을 파헤쳐라', 이긍하의 '말의 깡패에 관하여' 등이 실렸다.

장준하는 권두언 '본지 지령 100호 기념호를 내면서'에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강렬한 의욕의 불길이 내 가슴을 태우던 시절이 다시 새롭다. 왜적에 항거하여 중국대륙에 망명하던 선배들의 뒤를 따라 나의 젊은 넋도 민족혁명의 제단 위에 불살르겠노라 맹세하며 나섰던 길이언만 그대로 참아 견디기에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하면서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손들에게는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하여' 새롭고도 과감한 전전을 약속한다."라고 썼다.
덧붙이는 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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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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