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든 옷의 장수대로 공임을 받는 객공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봉제업은 12시간 넘는 장시간노동이 일상화돼 있다.
윤성희
양복점에서 도망치듯 서울로 상경
양복점 일이 잡화점 배달보다는 덜 고달프기를 희망했다. 양복점에서 숙식이 해결되니 집에선 입 하나를 덜 수 있어서 좋아했다. 심부름 하는 틈틈이 다림질 하는 법부터 배웠다. 그런데 선배들의 텃새가 심했다. "다방에 가서 커피 세 잔만 사와라" "돼지부속집에서 고기 두 근 사와라" 같은 잔심부름은 애교 수준. 가르쳐주는대로 잘 못할 때는 긴 자로 맞기도 하고, 옷 폼 잡아주는 쇠연탄 다리미가 날아오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기술자로 성장했다. 3년이 넘어가자 제법 바지, 조끼들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남성복의 마지막 단계인 재킷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기성복이 막 나오기 시작하면서 양복점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던 시점이었다. 장사가 안 되니 이근표처럼 견습생이 받는 임금은 극히 적었다. 당시 그가 받던 월급은 3만5천원 선. 1년차 우유배달원 월급이 4만2천원 정도였으니 집에 생활비 좀 보태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양복점에서의 밝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던 그를 친구들이 꾀어냈다. 그가 기술을 익히는 동안 고등학교를 다니던 동창 셋이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자 그도 덩달아서 마음이 동했다. 양복점을 몰래 도망치듯 나왔다. 집에서도 그가 서울로 간 걸 몰랐다.
"양복점에서 일할 때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 집에 잠깐 가거나 못 갔어요. 서울 와서도 가끔 내려가다가 거의 안 갔죠, 시골에선 큰아들이 있다고 생각 안 하고 나도 그렇고..."
시골집을 새로 지으면서 상량에 식구들 이름을 적을 때 아버지가 장남 이름은 뺄 정도로 그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근표는 친구들과 달리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던 처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아버지도 집을 등한시하는 큰아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소원했던 관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년 전인 2003년에야 풀렸다. 병상에 있어도 도통 그를 찾지 않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불러서 내려갔더니 "발을 씻겨 달라"고 하셨다. 그날 발을 씻겨드리면서 서로 맺혔던 마음들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공무원보다 더 잘 벌던 시절
아버지와 화해하기까지 25년여를 이근표는 스스로 인생을 개척했다. 친구들을 따라 서울로 온 건 1977년쯤. 같이 온 친구의 형이 일하던 동대문구 신설동의 한 의상실을 소개받았다. 남성 양복을 만들어본 그에게 여성 정장과 원피스 등을 만드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그 형과 같이 3평 남짓한 작은 의상실에서 먹고 자면서 양장일을 배웠다. 따로 밥을 주지는 않았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근처 식당에서 사먹고 저녁은 라면으로 때우는 생활을 이어갔다. '다이'라고 부르던 작업대에서 하루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다이 밑에 이불을 펴고 잠이 들었다. 쥐와 벌레들이 돌아다녔지만 피곤해서 그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씻고 자기에도 바빴다.
"일단 자야 내일 또 일을 하니까요. 어디 갈 데도 없고..."
일요일도 없이 1주일 내내 일하는 생활이었다. 양복점에서 배운 기술들 덕분에 1년여 만에 미싱사가 되었다. 그 뒤엔 좀 더 대우가 좋은 곳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중구 중림동, 후암동, 종로를 거쳐 이대 입구에서도 일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이대 입구는 의상실로 넘쳐났다.
"저녁에 일 끝나면 이대 입구가 우리 없으면 장사를 못할 정도로 의상실이 많았어요. 당구장이고 술집이고 우리들이 장악했었죠."
의상실에서 먹고 자며 일하기를 2년여, 서울시 중구 만리동에 사글세방을 얻었다. 함께 자취를 한 친구가 살림을 도맡았다. 청소, 빨래, 요리들을 그 친구가 다하면서 월세가 얼마인지도 잘 모르는 채 살았다.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가 적응을 못해 자꾸 공장을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일을 하고 친구가 살림을 맡게 됐다. 혼자 벌어서 둘이 써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벌이가 쏠쏠했다. 일이 많은 달은 중학교 교사 월급(1978년 기준)인 30만 원보다 더 벌었으니 미싱을 탈 만했다.
"그땐 공무원들은 김치 놓고 술 마셔도 봉제하는 사람들은 삼겹살 놓고 술을 마신다고 했어요."
물론 전제조건은 있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노동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점 말이다.
"타이밍이라고 하죠. 바쁠 때는 그걸 하루에 두세 알씩 먹었어요. 설이나 추석 같은 대목에는 거의 일주일씩 밤을 샜으니까요. 일하다가 고개가 고꾸라지면 발딱 일어나서 재봉틀을 돌렸죠. 졸다가 미싱 바늘에 손이 집히면 붕대 감고 그대로 일했고요."
말 그대로 그가 번 돈에는 피 땀 눈물이 담겨있었다.

▲ 손을 다치면 붕대를 감고서 재봉틀을 돌렸던 이근표 씨. 우리들이 입는 옷에는 봉제노동자들의 피 땀 눈물이 스며 있다.
윤성희
명품 옷도 만들었지만 몸은 곪아
"이대 앞 의상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자기 브랜드를 내고 업체들을 차리면서 패션산업이 시작됐죠. 지금도 있는 브랜드인 블루페페, 마르조의 대현 같은 곳이요."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개별 브랜드가 생기고 공장들이 커졌다. 월급쟁이 미싱사를 모집해 이근표도 브랜드 공장에 들어갔다. 닥스 같은 명품브랜드에 들어가는 옷을 비롯해 패션 초창기에 해외로 진출한 이용렬 등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만들기도 했다. 양복점에서부터 차근차근 봉제일을 배워 밍크코트까지 만들어본 이근표에겐 여전히 봉제기술자로서의 자부심이 남아있다.
"그때는 날고 기는 기술자였죠. 이름 있는 브랜드 중 안 해본 데가 거의 없어요."
패션산업이 발전하면서 일도 분업화되었다. 예전에는 미싱사 선생 한 명에, 미싱 보조 일을 해주는 제자, 다림질 등으로 봉제가 끝난 옷의 형태를 잡아주는 시아게, 봉제가 끝난 옷에 단추달기, 밑단처리 등 손작업을 하는 마도메 등 네 명이 한 조로 움직여서 옷을 만들었는데 1980년대 초부터는 미싱사와 제자 둘씩만 일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대신 시아게 등이 하던 마무리 작업만 따로 하는 공장이 생겨났다.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등 국제대회를 치르면서 1980년대 말 패션산업도 큰 호황을 맞았다.
"맞춤에서 패션으로 넘어가면서 브랜드들도 생기니까 일이 굉장히 많았어요. 사람 구하기가 힘들 때여서 그때만 해도 큰소리치며 다녔죠."

▲ 열악한 노동환경과 장시간노동은 봉제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친다. 이근표씨도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윤성희
필요한 물량은 많은데 기술자가 부족하니 '객공'이 봉제업의 대세가 됐다. 만든 옷의 장수에 따라 임금을 받자 객공인 미싱사들에게 출퇴근시간이 무의미해졌다. 새벽 6시에 나와서 밤 10시 넘어서까지 일하는 일이 흔했다.
"남들 하니까 나도 그렇게 일했죠. 그땐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나 죽는 줄 모르고 한 거지. 내 스스로 무덤을 판 거죠."
이후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그는 옷 먼지로 가득 찬 지하공장에서 하루 15시간씩 일했던 과거의 그가 병을 키웠다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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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②] "<히든 싱어> 나오는 그 옷, 우리가 만드는데... 먹고 살게는 해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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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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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털어 먹어가며 재봉질... 그땐 안 할 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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