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와 내신 외부평가제, 이 두 정책은 겉보기에 방향이 정반대인 듯 보인다. 전자는 학생의 선택권과 다양성을 강조하며 개별화된 교육을 지향하고, 후자는 공정성을 명분으로 전국 단위의 통일된 평가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실제로 고교학점제 입안자들은 국가교육위원회의 외부평가제 도입 논의에 대해 철저히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정책들을 설계한 이들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닮은 점이 많다. 이들은 대체로 50~60대 이상의 교육 엘리트 집단이다. 산업화 시기, 전국이 고르게 열악했던 교육 환경에서 자라나 서울에 진출하고,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성취를 이룬 경험을 공유한다. 지역 출신, 혹은 중하위 계층 출신으로서 서울의 중산층 자녀들을 이겨냈다는 개인적 서사는 이들에게 깊은 자부심이자 정책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기회는 원래 열려 있었고, 노력하면 길은 있다"는 관점을 갖는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경험을 보편화하여, 지금의 청소년들도 '선택권'만 주어지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늘날의 구조적 현실과 충돌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육 격차는 단순한 학업 성취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 접근성, 교육 인프라, 사교육 자원, 정서적 지지 체계, 그리고 진로 설계 경험의 질까지 모든 영역에서 지역과 계층 간 차이는 뚜렷하게 벌어졌다.
수도권 고교의 선택 과목 수는 지방의 1.6배에 달하고, 진로 체험 기회나 대학 정보 접근성도 수도권이 월등하다. 디지털 콘텐츠의 보급은 늘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관계 자본'과 '맥락적 지지'는 오히려 양극화됐다. '기회의 평등'은 표면적으로 존재하더라도, 그 밀도와 질은 전혀 다르다. 서울의 학생은 학교 안팎에서 다양한 진로 모델과 경험을 접할 수 있지만, 지방의 학생은 단일 교사에게 모든 과목과 진로 지도를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구조적 조건을 무시하고, 학생에게 '선택의 자유'만 부여하면 공정하고 효과적인 교육이 될 것이라는 사고는 현실을 오독하는 것이다.
고교학점제와 내신 외부평가제는 각기 다른 이념과 정책적 노선을 가진 듯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동일한 '성장 서사의 일반화'가 존재한다. 한쪽은 학생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면 '스스로 길을 찾을 것'이라는 신념을, 다른 한쪽은 '공정한 평가'만 있으면 '실력이 있는 학생이 올라올 것'이라는 신념을 갖는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지금의 학생들이 처한 구조적 제약과 동기의 결핍, 그리고 사회적 자본의 불평등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공통된 맹점을 드러낸다.
정책은 '기억'이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특히 교육정책은, 과거 특정 세대의 성공 경험을 일반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 청소년의 조건을 전제로 해야 한다. 지금은 '의지'가 아니라 '배경'이 성패를 좌우하는 사회다. 부모의 정보력, 지역의 교육 환경, 그리고 사회적 연결망이 성적과 진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격차를 교정하지 않고, 오히려 선택 혹은 경쟁을 부추기는 정책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정책 설계자들이 반드시 자각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성공은 특정 시대의 특수한 조건에서 가능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모두가 비슷하게 가난했고, 학교 간 격차도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노력이라는 변수가 상대적으로 유효했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교실 안에서도 서로 다른 나라의 교육을 받는 수준의 격차가 존재한다.
고교학점제든 내신 외부평가제든 공통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정책의 수혜자와 설계자의 간극'이다. 정책은 현실을 기준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 현실은 구조적 불평등과 교육 기회의 밀도 차이라는 복잡한 조건으로 이뤄져 있다. 성공 서사를 바탕으로 한 이상론은 그 자체로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육 평등을 실현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교학점제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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