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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모아 여행 가는 발달장애 직장인들, 단짝과 떠납니다

발달장애인 자유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 스스로 준비하고 실행하며 함께 성장한다

등록 2025.07.05 14:20수정 2025.07.0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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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과 '함께'라는 기대감.
'여행'과 '함께'라는 기대감. marissacristina on Unsplash
나의 첫 자유여행은 서른 살 유럽이었다. 자유여행은커녕 해외도 거의 가본 적 없던 내가 부모님의 환갑을 맞아 과감하게 3주짜리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슬로베니아부터 크로아티아, 스위스, 프랑스를 거치는 긴 여정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해외 자유여행 경험이 없었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유럽여행에 대한 막연한 로망만 있었다. 인터넷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 나와, 똑똑한 딸들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 믿는 부모님이 용감하게 시도한 첫 여행이었다. 파워 'J'처럼 5~6개월 전부터 교통과 숙박, 관광지를 예약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여행을 앞두고는 불쑥불쑥 불안이 솟구쳤다.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떠난 첫 자유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큰 문제 없이 계획대로 모든 여정을 소화했고, 엄마는 패키지와는 다른 자유여행의 매력에 푹 빠졌다. 물론 엄마의 여행은 자유여행이라기보다는 개인 가이드가 붙은 패키지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단체버스에 실려 무작정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내는 여행은 엄청난 만족감을 주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정보를 찾아 여행 계획을 세우고 낯선 여행지를 내 발로 찾아 헤매는 성취감에 매료됐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나는 게 취미가 되었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시간적, 금전적 제약을 빼면 자유여행을 떠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나와 달리, 엄마의 자유여행은 내가 함께할 때만 할 수 있는 제한된 기회였다. 정보 검색도, 온라인 결제도, 외국어도. 엄마의 자유여행에는 너무 많은 장벽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치트 키'인 딸은 여행마다 엄마와 동행할 만큼의 효녀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물리적, 심리적, 정보 접근성 등의 제약 때문에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관광 취약 계층이 많다.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 가족 등등 누군가에게 여행은 남들과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13년 근무한 발달장애인 대안학교를 지난 2월 퇴사하고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자유여행을 꾸리는 '길 위의 스튜디오'를 시작하게 된 것은 여행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그들이 얼마나 설레고 행복해 하는지, 또 여행을 통해 얼마나 성장하는지를 절실히 체감했기 때문이다.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감사하게도 달랑 사무실 한 칸 밖에 없는 공간에 예상보다 빠르게 참가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전에 함께 여행을 한 경험이 있거나 이미 학교를 졸업해 후배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친구들이었다.


이미 오사카와 홍콩 자유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졸업 후에도 프로그램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동안 못했던 친구들은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나 역시 덥석 믿고 찾아와 준 친구들과 부모님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졸업생 위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해당 학교 졸업생이 아니더라도 참가할 수 있다. 기관 단위의 단체 신청도 가능하다(관련 연재 : 발달장애 대학생들과 해외 자유여행 도전기 https://omn.kr/28a17) .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달음에 모여든 친구들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달음에 모여든 친구들 권유정

학교를 퇴사한 후 새로운 시작에 선뜻 함께해 준 분들 덕분에 긴 세월을 헛되게 보낸 건 아니었구나 하고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오랜 세월 헌신해도 그 노고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애쓴 것 이상으로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참 기쁘고 힘이 나는 일이다.

새 사무실이 서울의 끝자락(도봉구 창동)에 있어도 경기도 일산, 동탄, 용인, 가평, 하남, 남양주, 수원 등 사방에서 먼 길 마다하지 않고 20여 명의 참가자들이 모였다. 직장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졌는데 다시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참가자, 대중교통과 지역 사회 이용이 능숙하지 않아 보호자 주도로 모임을 가져왔는데 여행 공부를 통해 자조 모임이 가능해지길 바라며 온 참가자, 단짝 친구나 연인과 여행을 꼭 가고 싶은데 자신들끼리 가기는 어려워 신청한 참가자 등등... 제각각 이유는 달랐지만 한결같이 '여행'과 '함께'라는 것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내 친구와 함께' 하는 소그룹 여행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여행지라도 싫은 직장 상사와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여행이 주로 부모님과 함께였다면,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접어들어서는 대부분 또래 친구에게로 욕구가 옮겨간다.

발달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친구에 대한 욕구가 높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달장애인은 학창 시절 등 성장 과정에서 또래친구와의 긍정적인 경험이 드물다. 교우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실패를 경험한 발달장애인들은 오히려 그래서 누구보다 '친구와 함께'라는 것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우리는 '단짝투어'를 열었다. 일반적인 여행상품과 달리 '단짝투어'는 여행지 선택부터 계획과 준비, 실행을 모두 스스로 하는 '배우고 떠나는 자유여행'이다. '내 친구와 함께' 하는 소그룹 여행이라는 차별성을 갖는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내가 선택한 여행지를, 내 손으로 준비하고 내 발로 찾아 헤매는 진짜 자유여행. 그것이 우리 여행의 콘셉트이다.

또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꾸리던 여행과 달리, 참가자 대부분 일을 하고 있는 직장인이다. 때문에 여행 사전 교육이나 여행 날짜를 정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월급을 모아 여행을 떠나고 여가를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다. 졸업 여행보다는 훨씬 실제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된다.

사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돈이다. 발달장애인들은 경제 관념이 다소 부족한 편이다. 수 개념이 약하기도 하고, 소득으로 삶에 필수적인 소비를 하는 게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있는 대로 아낌없이 쓰거나 반대로 무조건 아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매번 예상 비용을 계산하고 계획대로 소비하는 활동을 했지만,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학생들과 여행할 때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로 스스로 돈을 벌어 여행을 가는 친구들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행을 기대하며 돈을 모으는 활동이 쉽지 않은 직장 생활을 잘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여행의 목적도, 교육의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같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고, 삶의 질을 높여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길 위의 스튜디오'를 통해 함께 이루고 싶은 변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발달장애 #무장애여행 #자유여행 #여행교육 #길위의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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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들과 여행하는 특수교사. 여행을 통해 교실을 벗어나 길 위에서 보다 실제적인 삶을 가르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꿈꿉니다.


톡톡 6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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