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에서 이루어진 원탁토의 학생회는 비싼 원탁 대신 탁구대를 이용하여 훌륭한 회의장을 만들었다.
안사을
가장 빛났던 아이디어는 탁구대를 탁자로 사용한 것이었다. 원탁을 사자니 보관과 관리가 어렵고, 매번 빌리자니 낭비가 심한 상황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학생 스스로 여는 회의였기에 얼마 되지 않는 학생회 예산을 쓰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쥐어짜던 어느 날, 평소 엉뚱한 행동을 자주 하는 3학년 학생이 탁구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수백만 원의 예산을 아낀 셈이니 교장선생님께 특별상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해 두었다.
자성의 목소리를 기대했지만
토론의 주제는 총 10개였다. 학급회의를 통해 평소 학생들이 불편해하는 부분을 미리 조사하고 범주화한 결과였다. 점호시간, 시설사용, 생활교사(사감선생님), 흡연, 소음공해 등에 대한 탁자가 만들어졌다. 각 모둠에 한 명의 진행자가 남고 토론자는 20분마다 자유롭게 모둠을 옮겨 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이날 교사는 학생자치 업무를 맡고 있는 학생부장, 교장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뿐이었다. 학생들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교사들의 지도를 최소화한 것이었다. 학생부장은 간식을 사러 나갔고, 교장선생님은 뒷짐을 지고 아이들의 발언에 미소를 띨 뿐이었다.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사진을 찍는 데에 전념했다.
덕분에 아이들은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속에 있는 말을 마음껏 쏟아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이다. 매번 지각을 일삼는 아이들의 입에선 아침에 시끄럽게 깨우지 말아 달란 말이 나왔고, 어느 흡연자는 자기 몸을 자기가 망치겠다는데 상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적반하장 화를 부르는 내용들
안사을
성선설을 믿지는 않아도 고등학생 정도 됐으면 최소한의 집단지성은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학생회 아이들의 얼굴에 점점 지친 기색이 보였다. 생각 없이 거친 말을 뱉어낸 학생이 다른 친구들의 발언은 잘 듣지 않는 모습을 가리키며 나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학생회 아이들이 그런데 교사인 나는 어땠겠는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듣다 보니 화가 슬슬 올라왔다. 간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말로 내 머리에 연통이 있었다면 시커먼 연기를 포함한 불꽃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틀 제공하기
다행스럽게도 학생회와 교사 중 아무도 그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각 모둠의 진행자는 불만쟁이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제공된 종이에 성실하게 받아 적었다. 이윽고 순환 토론의 시간이 끝나고 모둠별 발표 차례가 되었다. 진행자는 두 시간 반이 넘도록 쌓인 의견을 차분하게 발표했다.

▲발표 모둠별로 각 주제에 맞게 수집한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
안사을
그들이 발표한 내용은 예상보다 정제되어 있었다. 날카롭고 이기적인 발언들이 발표자의 선한 마음을 통해 걸러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용을 왜곡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실제로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규칙을 지키려 노력하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성숙한 마음으로 거친 말을 뱉어낸 아이도 있었지만 선생님과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아이들도 많았다. 학생회가 참 대견했던 것은, 이 두 무리 간에 다툼을 부추기지 않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모든 말이 수집될 수 있도록 안전한 자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억지스러운 발언은 선한 공동체 앞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 생활교사나 정당한 규칙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비난한 문장이 발표되었을 때, 대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했던 나쁜 말이 발표되자 그 발언을 한 학생은 매우 겸연쩍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이들은 이미 안다. 체득되지 않았을 뿐이다.

▲정리 산만하던 아이도, 불만만 토해내던 아이도 다함께 뒷정리를 했다.
안사을
잘 된 한 번의 총회가 모든 아이들을 감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애써서 스스로 마련한 이 자리가 지속적인 변화의 물결이 될 수 있도록 적절한 물길을 내주는 것이다. 학교는 1년, 혹은 3년이라는 유통기한이 존재하는 사회이기에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일은 생각보다 시일이 촉박하다.
다음 총회에서는 이날 나온 갈등 거리를 간결한 문장으로 만들어 집중 토론을 진행하게 하면 어떨까 싶다. 가령 아이들이 그토록 싫어하고, 혹은 감사해하는 사감 선생님의 역할에 대해 말이다. <사감 선생님, 과연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찬반토론을 하다 보면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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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해왔습니다.
2025년,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를 통해 한 아이의 양육 뿐 아니라 한국의 교육, 인류와 생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민하는 시민기자가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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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시켰는데 모인 학생 130명의 갈등 해결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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