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다 싶으면 빠꾸' 아빠가 있으니 너무 힘들면 회사를 그만두라던 아빠는 양관식 그 자체였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당시 아빠도 퇴직을 고작 1년 남기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빠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에 상사에 치여 바짝바짝 말라가는 딸을 보는 아빠도 같이 멍들어가고 있었나 보다. 아빠는, 딸에게 '아니다 싶으면 빠꾸,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를 외치던 <폭싹 속았수다> 속 양관식 그 자체였다.
희한하게도 그 말 이후 나의 마음가짐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빌 언덕이 생긴 자의 여유였을까. '완벽하게 해내야 돼'라던 생각이 '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라고 바뀌자, 경직됐던 몸에 힘이 빠지면서 몸도 마음도 유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아빠의 그 말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 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꾸역꾸역 견뎌냈고 몇 년을 더 다닌 후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다. 어리바리하던 초짜가 '일 잘하는 직원'으로 소문까지 났었으니 나름 선방한 직장 생활이었다.
벌써 20여 년이 흘렀지만, 그때를 돌이켜보면 아빠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난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버텼든 포기했든 훨씬 가시밭길이었을 것만은 확실하다.
태산이 무너졌다
그렇게 나를 지켜주던 태산, 그 태산이 무너졌다. 20년 넘게 파킨슨을 앓고 계셨던 아빠는 열심히 운동하며 건강을 지켜내셨지만, 1년 반 전 급하게 응급실에 실려 가신 이후 급격히 병세가 진행되었다. 이제 아빠의 세상은 한없이 작아져버렸다.
청주 본가에 방문했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면 항상 터미널까지 함께 걸어가며 배웅해 주시던 아빠는, 낙엽이 떨어지던 날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벚꽃이 흐드러지던 날은 우리 집 현관 앞에서, 삼복더위가 기승이던 날에는 안방의 침실에서 잘 가라며 배웅을 해주셨다. 짧아진 배웅 거리만큼 아빠의 애틋함도, 나의 안타까움도 커졌다.
운동을 위해 사시사철 밖을 돌아다니시던 아빠에게 이제는 안방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하루에 한 번, 천천히 거실을 돌며 유리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짧은 순간이 아빠가 세상을 깨고 나오는 유일한 시간이다.
앉거나 서는 동작조차 타인의 도움이 필요해지면서, 혼자서는 일상을 꾸리는 삶이 어려워진 아빠는 다시 아기가 되었다. 너무나 애처롭고 안쓰러운 나의 아빠아기. 정신이 또렷하신 것이 다행이라면 천만다행이다.
세상살이 홀로서기가 버거운 딸을 보는 아빠의 마음이 이랬을까, 아빠를 보는 나의 마음은 너무나 애달프다. 쓰리고 안쓰러운 마음이 켜켜이 쌓이니, 사랑이란 철옹성이 견고히 높아진다.
'아빠랑 결혼할 거야'를 외치던 유아기 시절 이후, 아빠를 이리도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정확히는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평생 나를 지켜준 아빠... 이번엔 내 차례

▲ 바깥 출입이 어려운 아빠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미리 사진 찍어둔 샤스타데이지
변은섭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은 말한다.
내가 외줄을 탈 때마다 아빠는 그물을 펼치고 서 있었다. '떨어져도 아빠가 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한 번은 말해줄걸, 말해줄걸.
딸 금명이 외줄을 탈 때마다 그물을 치고 서서 "떨어져도 아빠가 있다" 말해주던 관식처럼, 내가 인생의 파고를 만나 외줄타기를 할 때마다 아빠도 평생 나를 위한 그물을 치고 서 있었다. 이제는 황혼의 시기에 외줄을 타고 있는 아빠를 위해 난 내가 펼 수 있는 가장 큰 그물을 치려 한다.
"아빠, 밑에 내가 있어, 걱정 마."
나를 살게 했던 아빠를 이제는 내가 살게 할 시간이다.
매일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하고,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주말이면 꼭 아빠가 있는 청주 본가로 간다. 집에서 아빠를 간호하는 엄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말없이 막내딸을 기다리고 있을 아빠를 위해 난 기꺼이 서울에서 청주로 향한다.
아빠의 황혼이 가시밭길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아빠의 작은 세상이 덫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누워있는 기나긴 시간이 외롭고 심심하지 않도록, 경직된 표정에 행복한 미소가 깃들 수 있도록, 지금의 이 순간이 행복하게 기억될 수 있도록 난 아빠를 위해 발걸음을 바쁘게 옮긴다.
아빠의 작은 손짓, 눈빛만으로도 아빠의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채는 막내딸은 오늘도 아빠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한다.
'내가 아빠 지켜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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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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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젠 내가 지켜줄게" 매주 서울에서 청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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