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노동시간', 누구를 위한 유연성인가

[풀어쓰는 노동시간]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노동시간을 요구하자

등록 2025.06.17 10:12수정 2025.06.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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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대 대선에서는 주요 후보들의 노동시간 공약이 세간의 이슈로 떠올랐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주4.5일제를 내세웠다. 범정부 차원 주4.5일제 실시 지원 및 실노동시간 단축 로드맵을 제시하여 2030년까지 OECD 평균 이하로 노동시간을 감축하겠다는 공약이다. 고용노동부 장관 출신의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노사합의를 기반으로 주52시간 근로시간제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공약 발표회에서 설명한 구체적 내용으로는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의 주52시간 적용 대상에서의 제외 및 유연근무 요건의 완화, 탄력근로제와 선택근로제의 단위기간 확대 등으로 노골적인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전면에 드러냈다. 이에 비하면 당시 이재명 후보의 공약은 노동시간의 단축에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의 한국의 노동시간 정책에 대한 경험상 유연화 없이 법정노동시간 단축만 추진될 것이라 믿기는 쉽지 않다.

1953년 근로기준법이 최초 제정·공포된 이후 1988년까지 법정 근로시간은 주 48시간이었고 허용되는 최대 주당노동시간은 60시간이었다. 이후 1989년 제 8차 개정 근로기준법에서는 법정근로시간을 주 44시간으로 단축하였으나 휴일 근무를 포함해 최대 64시간까지 연장근로가 가능했다. 김대중 정부의 공약사항으로 2004년부터 시행된 주 40시간 제도에서는 법정근로시간이 주 40시간으로 줄었으나, 최대 허용 노동시간은 휴일 근무 포함 주 68시간으로 또 늘어났다. 법정노동시간은 계속 줄어드는데 최대 허용 노동시간은 계속 늘어났던 아이러니로 인해 평균 노동시간은 줄어들었으나 노동시간의 양극화는 더 심각해져 온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2018년, 문재인 정부 시기에 최대 허용노동시간이 52시간으로 줄었다. 그러나 이번엔 6개월 단위의 탄력근로제, 연구개발 업무에서의 선택근로제, 특별연장근로의 허용 등 노동시간 유연화를 위한 제도가 새로 도입되거나 확대되었다. 이렇듯 노동시간 유연화는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꾸준히 강화되어 왔다.

 유연한 노동시간은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규칙적이고 예측가능한 노동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 유연한 노동시간은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규칙적이고 예측가능한 노동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pixabay

노동시간 유연화의 이중성?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하려다 중단되었던 노동시간 유연화 확대 정책, 즉 연장근로시간의 관리 단위 기간을 늘리려고 했던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떠올려 보자. 당시 정부의 주장은 기업과 노동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정책이라는 것이었다. 기업의 입장에서야 경기변동에 따른 수요 변화에 노동자의 추가 채용 또는 해고 없이 더 낮은 비용으로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익이 명확해 보인다. 정부는 노동자의 이익 또한 강조하며 노동자의 '선택권', '건강권', '휴식권'과 같은 핵심어를 제시했다. 물론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시간이 노동자의 선택이 아니라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훨씬 크며, 원하는 시기에 몰아서 일하고 장기휴가를 떠난다는 식의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현실에서 결코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개편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노동시간 유연화를 잘 활용하면 노동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면서도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할 수 있고, 특히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유연한 노동시간(flexible working hour)'을 검색어로 건강에 대해 연구한 논문들을 찾아보았을 때 대부분 노동자의 건강에 해롭다는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노동자의 건강에 이로운 영향을 보여주었다는 연구 또한 찾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소규모 연구(McNall 등, 2010)에서는 220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시차출퇴근제(flexitime)와 집약근무형 유연근무제(compressed workweek)가 직무만족도, 일-가정 균형에서 좋은 효과를 보였다는 결과를 보고했다. 시차출퇴근제는 하루 노동시간은 그대로 8시간이나 고용주에 의해 주어진 몇 가지 선택지 중 노동자가 선호하는 출퇴근 시각을 선택하여 일하는 것이며, 집약근무제는 주당 노동시간의 차이는 없으나 하루 노동시간을 늘려 출근일을 줄이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3.5일 또는 4일 출근한다. 다양한 측면의 유연한 노동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검토한 코크란 리뷰(Joyce 등, 2010)에서도 셀프-스케줄링(self-scheduling)과 같은 노동자의 선택을 반영하는 노동시간 유연화는 정신건강, 수면건강 등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경향을 보였다고 보고한다. 셀프-스케줄링은 주로 병원 등 순환교대근무제를 활용하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원하는 근무일과 근무시간을 먼저 제출하고 관리자가 이를 반영하여 근무일정을 조율하는 제도이다.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노동시간이 진짜 자유다

이렇듯 일부 형태의 유연한 노동시간제가 노동자에 미치는 이점이 보고된 바 있으나, 훨씬 더 많은 연구들이 유연한 노동시간이 건강에 미치는 나쁜 영향에 대해 보고해 왔다. 예를 들어, 한국의 근로환경실태조사를 사용하여 분석한 연구(Lee 등, 2020)에서도 하루의 노동시간이 일정하지 않거나, 주당 노동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 우울증상과 불안증상의 위험이 일정한 시간을 일하는 노동자에 비해 높았고 장시간 노동과 결합될 경우 그 위험은 더욱 높아졌다. 물론 이 연구에서 사용한 설문항목으로는 시차출퇴근제나 주 4일 집약근무제가 '불규칙한 노동시간'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루 노동시간과 주당 노동시간의 변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IMF 이후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인한 노동시장 양극화와 불안정노동의 양산으로 '유연화'라는 단어만 나오면 거부감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노동시간 유연화에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특히 일부 형태의 유연근무제는 노동자에게도 환영받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 가지 유념할 지점은 노동시간의 유연성이 노동자로부터 유래되는지 또는 고용주로부터 유래되는지이다. 시차출퇴근제나 셀프-스케줄링 제도는 노동자로부터 유연성이 유래되는 측면이 있다.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노동자 개인의 삶의 방식에 좀 더 유리한 시간을 선택하도록 설계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은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계약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에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한 자유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불안정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권은 더욱 낮다. 그 때문에 유연성의 정도에 제한이 필요하다. 시차출퇴근제나 집약근무제 역시 노동시간의 규칙성을 고려할 때 유연성이 큰 제도라고 볼 수 없다. 경직된 노동시간일수록 예측가능성이 높아지고, 예측가능성이 높아져야 일-삶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안전보건 월간지 <일터> 6월호에도 게재됩니다. 이 글의 필자인 이혜은 님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노동시간유연화 #불규칙장시간노동 #일생활균형 #유연근무제 #주4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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