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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글쓰기, 최선을 다해 고치면 다 도망간다

글 잘 쓰는 법은 '자기 삶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태도'

등록 2025.06.19 10:32수정 2025.06.1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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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어르신 글쓰기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누가 들어도 좋은 말이지만 누구도 읽지 않을 글을 자주 쓰신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사랑과 봉사의 마음으로 남을 섬기면서 사는 삶이 훌륭한 삶이다' 식의 글이다. 이 앞에 '사랑과 봉사'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물론 없다. 밑도 끝도 없는 사랑과 봉사다.

수업 초창기 때의 나는 이런 글도 최선을 다해 고쳐드렸다. 나중에 보니 최악의 행동이었다. 그만큼 쓰느라 이미 에너지를 다 쓴 어르신께 뭘 고치라고 하는 말은 글쓰기 흥미를 떨어뜨리는 지름길이었다. 이제는 굳이 고치려 하지 않는다. 글 속에서 칭찬 거리만 찾는다. 그래놓고 딴 나라 이야기 하듯 질문을 던진다.


"굳이 글쓰기 수업을 듣는다는 건 남이 내 글을 읽었을 때 오우, 좀 쓰네? 소리를 듣고 싶으신 거잖아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들 웃으시며 고개 끄덕이신다. 그 미소에 나는 용기를 얻는다.

"남들이 칭찬하는 글을 쓰려면 훌륭한 말을 쓰는 게 좋을까요.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쓰는 게 좋을까요?"

여기서는 반반으로 의견이 갈린다. 이때 나는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은 모두 훌륭한 말이지만 모두 안 듣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래 놓으면 어느 복지관이든 '직접 겪은 일'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어르신의 글이 단박에 좋아지진 않는다. 그랬어도 분량을 채웠다는 자체가 중요하다. 글쓰기에서 퇴고는 중요하지만 어르신 글쓰기는 꼼꼼한 퇴고보다 계속 쓰겠다는 마음 자체가 더 중요했다. 그 마음이 좋은 글을 만든다.


몇 주 전에도 꼭 그랬다. 유튜버 하시는 어르신이 글을 써오셨다(관련기사 : 79세 유튜버에게 배우고 싶은 것). 작년까지 친구들과 장미축제를 같이 갔는데 올해는 혼자 갔다는 내용이었다. 아래는 그 글의 일부다.

이젠 다들 걷는 것도 쉽지 않다 하니 안타깝고, 마음이 저며 옵니다. 그래서 생각 했지요. 내가 대신 보여줘야겠다. 장미들의 고운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다들 내가 다녀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참 고맙다라고 합니다. 그말에 가슴이 뭉클 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절이 장미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참 빠릅니다. 건강도 기운도 예전 같지 않지요. 그래도 나는 소원합니다. 내년엔 부디 친구들이 다시 건강을 되찾아서 이 장미 공원에 함께 와 주기를.

발표가 끝난 후 누군가 '올해 못 갔으면 내년엔 더 못 간다'라며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어르신 돌봄과 아이 돌봄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이 돌봄은 시간 지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지만 어르신 돌봄은 그런 희망이 거의 없어서다.


장미축제 79세 어르신이 직접 찍고 편집한 유튜브 영상
▲장미축제 79세 어르신이 직접 찍고 편집한 유튜브 영상 박정신유튜브

나는 내가 아무리 따라 써도 이 감정은 흉내 낼 수 없음을 강조했다. 사라져가는 시간을 지켜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기록이라 특별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말씀은 없지만 이런 글이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아픈 친구에게 본인을 영상으로 남기는 그 수고가 멋지다'는 내 말에 어르신 얼굴이 밝아졌다.

내년 장미축제도 높은 확률로 이 어르신은 혼자 갈 것이다. 아니, 혼자라도 갈 수 있으면 다행이다. 여든을 앞두고 있으니 어떤 건강 이슈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나아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 쓸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어르신들께 묻는다.

"그때, 마음이 어땠는지 조금만 더 얘기해 주세요."

그 순간 어르신 눈동자에 아주 오래전의 햇살이 스친다. 누군가 살아냈던 한 시간이 다른 이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면, 그건 이미 훌륭한 문장이다. 글을 잘 쓰는 법은 기술이 아니다. 자기 삶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태도다. 멀리 있는 멋진 말이 아니라 오늘 내 앞의 삶을 단어로 건져올릴 용기, 그걸 나는 매주 이 수업에서 본다.

그리고 나는 그 용기의 편집자이자 관객이다. 어르신들의 한 문장이 내 안에서 오래 살아남는 이유다. 내년 장미축제도 어르신의 유튜브 영상을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복지관글쓰기 #시니어글쓰기 #노인글쓰기 #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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