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출발선이 아니라 벽 앞에 선 아이들

고교학점제에서 소외되는 학생들

등록 2025.06.19 14:19수정 2025.06.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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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그냥 국어와 미술만 하고 싶어요."

2년 전, 고등학교 1학년 첫 상담 시간, 우리 반 학생이 내게 털어놓았던 말이다. 그 아이는 학교를 좋아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주고, 복도에서 눈 마주치며 인사하면 웃음을 지었다. 글을 잘 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수업시간엔 늘 고개를 책상에 묻고 있었다. 공부를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아이였다.

그 학생의 엄마는 오랫동안 편찮으셨고, 아빠는 늘 늦게 귀가하셨다. 어릴 적부터 동생들 밥을 챙기고, 청소기를 돌리고, 가끔은 부모 대신 학교 연락을 받았다. 자라오며 한 번도 "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이 쌓이자 학습 결손도 함께 누적됐다.

자존감이 낮았지만 상상력이 풍부했고, 조리 있게 말도 잘하고 글쓰기도 잘했다. 늘 주눅 들어 있었지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다.

교사로서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안타까운 점은, 고교학점제에서 이런 학생들의 소외와 학교 이탈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고교학점제가 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일까? 교육부는 이 제도를 통해 학생들이 자기 진로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고, 개별 성장 경로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듣기엔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이 아이는 고교학점제 아래에서 더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시범 운영 당시였지만 이미 모든 과목에서 최소 성취수준 미도달 판정을 받았다. '미이수 대상',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 '보충학습'이라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고교학점제 아래에서 소외되고 이탈하는 아이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선택'이란 말은 실상 "너에게 더 많은 선택 책임을 지워 줄게"라는 의미로 작용한다. '진로'라는 말은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사실상 '선택'의 언어다. 그러나 선택이 가능하려면 자신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다양한 정보와 비교 능력, 그리고 안정된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지만, 어떤 학생에게는 시작도 어려운 일이다.

2025년부터 고교학점제의 '미이수 제도'가 본격 시행되었다. 성취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학점을 부여받지 못하고, 보충·추가학습을 반복해야 한다. 교육부는 이를 통해 '최소 성취 수준을 보장'하고 '출발선의 평등'을 실현하겠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와 동떨어져 있다. 출발선에 서려면 운동장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달릴 신발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정 내 돌봄을 받지 못하고, 사교육은 커녕 제대로 된 책상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출발선'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미이수 경고와 예방지도 대상, 보충학습 통보는 이 아이들에게 또 다른 낙인이 된다. '넌 뒤처졌어', '넌 따라오지 못했어'라는 사회적 낙인은 결국 아이를 교실에서 이탈시키고 만다. 교사들이 손을 붙잡아도, 제도는 조용히 그 아이를 밖으로 밀어낸다.

고교학점제가 '학생 중심'이라면, 그 학생은 누구인가?

성적이 우수하고 진로가 명확하며 정보 접근성이 좋은 일부 학생인가? 이 제도는 그런 소수에게 '선택과 집중'이라는 자유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이해조차 하지 못한 채, 삶의 기본을 가꾸기도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그 자유가 오히려 두려움이자 부담이다.

진정한 '학생 중심 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기초에 있다. 특히 교육적 자원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편향된 선택'보다 '기초기본소양'이 더 절실하다.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 문제를 해결하고 협업하는 능력,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 이런 능력이 먼저 길러져야 진로를 향한 선택도 가능해진다.

고교학점제는 지금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한 경로를 학생들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그 복잡함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학생에게 '선택'은 '배제'가 될 수 있다.

교육은 줄 세우기의 장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성적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다지는 교육. 상위권 몇몇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아이들이 중심에 설 수 있는 교육.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공교육의 출발점이 아닐까.
#고교학점제 #입시제도 #교육 #불평등 #교육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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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현안에 깊은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20년차 교사입니다. 학교와 교육정책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현장의 시선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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