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 추존 장조와 현경황후 능
문운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25세의 나이로 즉위한 정조는 첫 교지에서 자신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했다. 이후 정조는 이 선언을 정치적 실천으로 옮겼다.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내리고, 1789년에는 그의 무덤인 영우원을 화산(지금의 화성시)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지었다.
뒤이어 1899년,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 로 추존하고, 무덤 역시 융릉으로 격상 황제의 예우를 갖추게 된다. 현륭원(융릉)은 정조가 효심과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한 모든 계획의 중심이었다. 수원화성, 화성행궁, 원찰인 용주사는 모두 현륭원, 곧 오늘날의 융릉을 중심으로 계획된 대역사였다.
정문을 지나 제실과 곤선지를 거치면 능역으로 이어진다. 홍살문 너머에는 향로와 어로가 나란히 펼쳐진다. 향로는 제관이 걷는 길, 어로는 임금이 걷는 길이다. 그 끝에는 제향 공간인 정자각이 자리한다. 뒤편 경사면에는 봉분과 석물이 단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융릉은 조선 왕릉의 기본 구성을 따르고 있지만, 정자각이 봉분과 일직선을 이루지 않는 점이 독특하다. 해설사는 뒤주 속에서 8일간 고통받았던 사도세자가 사후에는 앞이 탁 트인 시야를 가지기를 바란 정조의 배려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삶이 안타까웠다.
이어서 비각에 이르니, 특별한 비석 두 기가 눈에 띈다. 하나는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쓴 현륭원 비, 다른 하나는 고종이 황제로 추존하며 쓴 융릉 비다. 서로 다른 시기의 글씨이지만, 두 비석 모두 사도세자를 향한 이들의 마음이 담긴 특별한 기록물이다.
융릉을 둘러본 뒤, 인근의 건릉으로 이동한다. 건릉은 정조 본인의 능으로, 아버지의 곁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 효심의 완결점처럼 느껴진다. 능역 주변에는 잘 정비된 소나무길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 역사적 여정을 마무리하며 걷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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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야 황제된 비운의 세자... 탁 트인 시야, 왜 슬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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