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나무 왕버들 1919년에 신설된 대전 감옥은 도심이 확장되면서 1984년에 외곽으로 이전했다. 대전형무소의 역사성을 알았던 마을 사람들은 그 터에 덩그러니 남겨진 왕버들 나무에 의미를 부여해 ‘평화의 나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이 다시는 재발되지 않고,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함께 시를 만들었다
임재근
그런데, 대전형무소는 1919년 신설부터 1984년 이전할 때까지, 65년의 역사 속에 다층적 성격과 특징 그리고 교훈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그곳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의 삶을 통해 항일의 정신을 배울 수 있고,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통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은 한동안 극히 일부의 성격만 특별히 부각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84년에 대전교도소를 외곽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대부분 지역을 민간에 매각해 대규모 아파트와 상업 시설이 들어섰는데, 매각하지 않고 국가에서 보유하던 잔여 공간을 반공교육의 상징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곳엔 충남반공종합교육회관(현 자유회관)이 들어서고,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이 세워졌다. 감옥 시설 대부분을 철거했지만, 망루와 우물을 각각 1개씩 남겨두었다. 그중 우물을 남겨둔 이유는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 즉 인민군에 의한 학살을 부각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산내 골령골'은 대전형무소 터에서 한동안 금기의 단어였다. 그러다가 2010년 마을역사탐험대 활동을 통해 옛 형무소 터에 남아 있던 왕버들 나무에 의미를 부여해 '평화의 나무'로 명명하며 지은 시에서 처음으로 '산내 골령골'이 등장했고, 그후로 다시 10년 후 역사공원화 공사를 통해 전시물이 종합적으로 마련되면서 대전형무소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편향된 기억과 기록이 조금씩 균형을 잡기 시작했고, 대전형무소의 역사성도 다층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말할 때, '교통의 도시'라 말하는 경우가 있다. 국토의 중간에 자리하고, 철도뿐 아니라 도로 교통망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필자 또한 대전에 살면서 교통이 참 편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대전은 과학기술도시의 정체성도 지니고 있다. 1970년대 대덕연구단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연구기관과 과학기술 인재가 대전으로 몰려들었다. 또, 최근에는 '밀가루 도시' 또는 '빵의 도시'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필자는 여기에 덧붙여 '죽음의 도시'요, '무덤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자주 설파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왜 그렇게 부정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려 하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20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대전에서 사는 필자는 대전이라는 도시가 대단히 만족스럽다. 다른 도시보다 자연재해가 적고, 인구 밀도도 높지 않고, 교통체증도 심하지 않다. 필자는 대전을 안전하고 평화로운 도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전 도심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전쟁이 우리 삶을 이토록 처절하게 파괴한다는 사실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더 큰 충격은 그런 전쟁의 이면에 감추어지고 외면받았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과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대전 시가지의 모습 이 사진은 AP통신의 제임스 프링글(James Pringle)이 1950년 9월 30일에 당시 대전시청사 옥상에서 찍었다. 전면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산이 대전에서 가장 높은 식장산이다. 파괴된 도심은 현재 은행동 일대이다
AP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일상은 과거에 발생한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고 재건해 낸 결과이지만,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와 유가족의 상처는 온전히 치유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의 노력이 쌓여 옛 대전형무소 터, 충남도지사공관, 산내 골령골로 이어지는 민간인 학살사건 관련 다크투어가 진행되고 있기는 하다. 최근에는 대전의 동남 쪽에 있는 '국가에 의한 죽음'의 상징공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지와 대비해 반대편 대전의 서북쪽에 자리한 '국가를 위한 죽음'의 상징공간, 대전현충원을 엮어 역사탐방과 평화인권기행에 나서기도 한다.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는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당시 가해 부대 책임자들이 장군까지 진급했다는 이유로 국립묘지법에 따라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데 비해,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수십 년 동안 골령골 골짜기에 암매장되어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하게 한다. 왜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는커녕 국민의 생명을 불법적으로 학살했을까? 왜 우리의 역사는 국가에 의한 전쟁범죄를 외면해 왔던 것이었을까?
죽음과 무덤을 넘어 평화와 인권의 도시 되길

▲대전현충원 전경 현충원 너머로 대전 도심이 보인다. 대전 도심 너머 대전현충원과 반대 방향으로 산내 골령골이 있다. 대전에는 ‘국가를 위한 죽음’의 상징지와 ‘국가에 의한 죽음’의 상징지가 상반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임재근

▲전쟁은 우리 삶의 터전을 처절하게 파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 전쟁으로 파괴된 1950년 9월의 도심 사진 조각과 전후 복구 작업 후 재건되어 일상을 즐기고 있는 2015년의 사진 조각을 반복·연결해 편집했다
임재근
산내 골령골에는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들이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에 달하고,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를 비롯해 군인 등 10만 명 이상이 안장되어 있다. 한 도시가 상반된 지역에 상반된 죽음이 다수 공존하다 보니 필자는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에 '죽음'과 '무덤'을 덧붙이며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듣는 사람도 불편하겠지만, 사실 말하는 필자 또한 불편하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과 같은 국가폭력에 의한 상처는 지우고 외면한다고 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폭력과 연관된 장소를 찾아가며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상처를 드러내 놓고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슬픔에 함께 울어줄 때 치유 가능성은 커진다.
필자가 '교통의 도시', '과학기술 도시', '빵과 밀가루의 도시' 등 복합적 정체성에 덧붙여 '죽음'과 '무덤'을 말하는 이유는 '죽음'과 '무덤'의 정체성을 넘어, 대전이 '평화'와 '인권'의 도시도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내 골령골을 비롯해 국가 폭력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고, 평화가 파괴된 곳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산내 골령골을 찾는 이들이 많아져 골짜기가 북적이고, 전시관에 들어서기 위해 줄 선 모습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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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교통, 과학 그리고 무덤...대전이란 도시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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