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상대 (주)이에스기술연구소 대표와 고 김광석.
민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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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석 노래 열창하는 이 남자, 알고 보니… 민상대 (주)이에스기술연구소 대표가 경기도 안양 평촌의 한 호프집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고 있다. 20대의 민상대가 자주 부르던 곡, 고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 민상대 제공
서른 살이던 2008년 11월 1일, 그는 직장 생활을 접고 사업을 시작했다.
"영업 일을 하다 보니 술에 절어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잦았고, 가정생활이 제대로 안 됐어요. 첫 아이도 태어났는데 말이죠. 또 그즈음 비로소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됐는데, 저는 사람 만나는 건 좋아하지만, 그 관계를 통해 뭔가를 요구하거나 쟁취하는 데는 너무 서툴렀어요. '우리 물건 좀 팔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회사를 다니면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해야 하고 이걸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 영혼을 돈과 바꾸는 것 같았어요."
이것이 바로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든 결정적인 이유였다. 사업을 한다는 말에 그의 아내는 "3개월은 생활비 안 줘도 좋으니 일단 3개월만 해보라"는 조건부 허락을 내렸다. 3개월 후에도 안 되면 그만두라는 무서운 말이기도 했다.
'전자상거래'를 해보고 싶었던 것도 창업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전자상거래는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고, 직장 다니면서 꼭 해보고 싶었지만 사장의 반대로 못 했던 일이었다. 기획, 글쓰기, 사진찍기 등 그의 재능은 전자상거래를 하면서 빛을 발했다. 그동안 직장에서 맡았던 일만 해야 했던 그 재능이 사업을 하면서 활짝 피어난 것이다. 재능이 커질수록 사업도 성장했고, 일할수록 신이 났다.
"제품 사진 찍고 블로그에 글을 직접 올렸어요. 제가 선정한 광고 키워드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내 블로그가 꽤 유명해졌다는 걸 느꼈고, 그 덕분에 회사 영업이 활성화됐고 회사도 자연스럽게 커졌죠."
17년간 사업하면서 그는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꾸준히 성장해 직원도 한때 16명까지 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속도를 줄였다.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일까 깊이 고민했어요. 밤낮없이 일하며 회사를 키우는 사람이 될 것인지 생각하다가, 결국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만큼은 좋은 아빠로 곁에 있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어요."
그즈음 그는 다시 공부를 결심했다. 방송통신대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해 2년 만에 학위를 취득했고, 이어 경영 MBA 석사과정에 지원해 2년간 심리코칭을 공부했다. 이 시간을 통해 경영과 사람에 대해 깊이 배울 수 있었으며, 특히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 점이 큰 소득이었다.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운 그의 삶의 철학과 경영 방침은 '일과 삶의 조화를 지키자'다.
사업 부도로 인한 빈곤과 원치 않았던 부모님과의 이른 이별 등 불우한 성장기를 포함한 인생 1막을 그는 '그려진 대로 받은 그림책'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며 펼쳐진 2막은 '내가 그리는 스케치북'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려진 대로 받은 그림책'을 들고 사는 이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살피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챙겨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무엇인지 잊지 않으려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힘겨웠지만, 1막은 1막대로 좋았다

▲ 세계최대 카리용벨 설치팀 통번역 아르바이트 시절.
민상대
힘겨웠지만, 그의 기억 속 인생 1막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1막은 1막대로 좋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그 시절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지금도 즐거운 인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심리코치 자격증을 취득했고, 2024년에는 노란우산공제 모델 선발대회를 통해 모델로 데뷔하는 등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또한 즐거운 삶을 위한 그의 노력이다.
민상대의 화려한 2막을 가능케 한 1막은, 그가 스물여덟이던 2005년 MBC 표준FM <여성시대>를 통해 공개한 사연에 잘 드러난다.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쓰고 당당히 공개하는 일 역시 젊은 시절부터 즐거운 삶을 위해 꾸준히 해온 그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날 생자 하나 새기고 사는 스물여덟 젊은이의 일기
나는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조금 빠른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을 살았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3남 1녀 중 막내로 낳으시고 정말 귀여움받는 막내로 키워주셨다.
어렸을 적엔 뭐든지 하다가 안 되면 엄마나 형에게 말하면 해결됐다. 잃은 딱지도 형이 따다 줬고, 괴롭히는 불량배 형들도 결국 두 형이 끝까지 찾아내서 사과를 받아줬다. 든든한 백이었다. 또 건축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해적 칼이 필요하면 합판을 오려서 멋진 칼도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렇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안전망이 되어주던 아버지가 고1 때 갑자기 돌아가시고, 어머니 또한 그 충격으로 7개월 후 유언도 없이 뇌사하셨다. 우리 손으로 어머니의 호흡기를 떼야 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을 때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힘든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투정 부릴 곳이 없었다. 억울함을 호소할 넉넉한 가슴들이 멀리 떠났다는 걸 아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힘든 고3 생활을 마칠 즈음 그래도 공부는 부족하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상경을 결심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때 큰 형은 뒷받침할 능력이 없으니 자기 일을 도우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현실에 무릎을 꿇으면 내내 후회하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2년제 대학이라도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녀야겠다 생각했다. 빨리 학교를 마치고 돈을 벌어서 다시 학교를 다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그렇게 대전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입학을 하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첫 아르바이트는 패스트푸드점 주방 일, 차비가 아까워 한겨울에도 사이클을 타고 집에서 30분 거리를 매일 출근 했고 다른 친구들이 여가를 즐기는 시간에도 자투리 아르바이트를 하나씩 더 했다. 그렇게 해서 가족들이 살기에 바빠 면회도 오지 못할 외로운 군 생활을 대비한 자금도 준비할 수 있었다.
제대 후에는 쥐가 들락거리는 작은 자취방에서 뿌듯한 독립을 선언했다. 제대 다음 날부터 대학 졸업까지 2년간 한 아르바이트가 무려 23가지. 노래방 카운터, 8장 접시 들기 서빙, 순댓국집 배달, 피시방 관리, 막노동 등 힘든 일도 많았고, 반면에 가슴 뿌듯한 순간도 많았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까지 가서 전공 공부를 할 수 없었기에 외국인 교수 조교를 자처했고, 나를 기특하게 봐주신 40살의 독신 미국 교수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통역 아르바이트로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가 생겼고, 그 시간을 이용해서 취미 생활로 통기타 동아리 활동도 했다. 그러다가 평생 잊지 못할 통기타 가수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됐다. 아마 양희은 이모는 아실 것 같다. 학비를 벌기 위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그 쓸쓸한 마음을.
아파도, 기분이 우울해도 상관없이 관객들에게 어떤 감동을 준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박치로 타고난 나에게 연습은 필수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연습한 노래들을 30분간 쏟고 혼미해질 듯한 정신을 추스리고는 관객들의 박수와 술 한 잔을 받으며 그 업소를 나서곤 했다. 작은 무대지만 관객들과의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날은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힘든 학교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보니 취업이 힘들다는 말만 나돌았다. 결국 가진 것도 의지할 곳도 없어서 바닥까지 내려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호주행 비행기표를 샀다.
도착 다음 날부터 청소, 식품점 배달, 설거지, 목수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일부는 귀국 후에 쓸 정착 자금으로 송금해 놓고, 일부는 누나의 결혼에 보탰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는 1년간 정말 바닥을 딛고 굳게 일어서 준 내게 보상해 주기 위해 한 달간 대륙 횡단 배낭여행을 했다.
나와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 사이에서 사막을 건너고 비행기를 타고 강물에 발을 적시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예전의 모습을 허물 벗듯이 벗어버린 내 모습을 보았다.
그래 나도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 귀국 후 자신감 하나만 믿고 서울에 상경하여 구두끈을 다잡아 매고 굳이 4년제 졸업 학생만 고집하던 회사에 다짜고짜 면접을 봐 보기 좋게 합격했고,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회사 창고 한 편에 목수 일을 하며 배웠던 기술로 수리해서 방을 만들고 수도를 설치했다.
어느새 상경한 지 2년, 내 나이 스물여덟 두 달 전 나는 봄날 햇볕 같은 맑은 웃음을 가진 영혼과 결혼을 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또 하나의 둥지가 틀어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난 10년. 철부지 막내가 홀로서기를 무사히 할 수 있었던 건 나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주변에 계신 분들, 그리고 부모님이 지켜주고 믿어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취업이 사상 최대 경쟁률을 기록하고, 젊은이들이 어깨를 움츠린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일자리가 있든 없든, 어떤 상황에서건 편하기만 한 인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生(날 생)자가 소가 날줄을 걷는 형상이라고 하지 않던가. 날 생자 가슴에 하나 새기고 어느 순간에도 소가 날줄을 타듯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세상에 임한다면은 주변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얼마든지 올 거라 믿는다.
요즘, 내가 받은 도움을 돌려드리고자 소아병 돕기 노래 공연도 계획 중이다. 내일 날이 밝으면 나는 다시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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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직 회사원의 퇴사 "3개월만 해보자"... 인생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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