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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는 몸을 흔들고 글쓰기는 마음을 흔든다

"선생님 만난 게 복입니다"는 말을 들은 날

등록 2025.06.25 18:32수정 2025.06.2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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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어요.[기자말]
어젯밤에 숙제 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어르신께 내가 대답했다.

"아유, 저희 반은 밤샘 금지잖아요. 글 쓰다 머리 아픈 건 회춘의 신호지만, 잘 자는 게 먼저입니다." (관련기사 : 글 쓰는 어르신께 세 번 연속 막말을 해봤다)


어르신은 머쓱하게 웃으시며 "글감이 자꾸 떠올라서요. 누웠는데 머릿속이 자꾸 말을 하더라고요"라고 덧붙이셨다. 그 마음을 나는 잘 안다.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잠자리를 밀어내고, 문장을 붙들고 싶어진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애정을 쏟는 마음이다.

후루룩파와 곰탕파, 둘 다 충분하다

나는 수업 끝에 늘 '생각만 하셔도 괜찮다'라고 강조한다. 다음주에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된다고, 우리 수업은 내 인생 '쓰면' 아니고 '풀면'이니 그저 오셔서 풀어달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어르신들은 언제나 약속처럼 글을 써오신다. '잘 쓰지 못했어도 써봤어요'는 공통된 후렴구 같다.

잘 쓴 글보다, 용기 내어 쓴 글이 내게는 귀하다. 내 수업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는 마음 같아서다. 그러니 나는 이 어르신들을 오래 만나고 싶다. 그래서 글은 천천히 와도 되니 건강으로 매주 출석해 달라고, 잘 쓰는 얼굴보다 잘 자는 얼굴이 먼저라고 말한다. 물론 잘 주무시고 숙제를 하는 분들도 계신다.

글쓰기 어르신들은 크게 '후루룩파와 곰탕파'로 나눌 수 있다. 수업 당일 복지관 오는 길에 후루룩 쓰시는 분, 일주일 내내 곰탕 우리듯 한참 동안 쓰시는 분이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매번 강조하지만 곰탕파는 후루룩파를 은근 부러워하신다. 그러다 오늘, 곰탕파 어르신 중 한 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선생님, 성지 순례 다녀와서 다들 글 한 편씩 냈는데요. 제 글이 뽑혔어요. 저 글쓰기는 원래 너무 싫어했는데 선생님 만난 게 복이에요."

나는 어르신을 만난 내가 더 복이라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내 수업과 시간이 딱 겹치는, 옆 강당의 노래교실 때문에 더 그랬다.


신나는 반주가 들려오면 나는 종종 작아졌다. 반주에 맞춰 목청껏 뽑아내는 시간이 어르신들께 더 필요한 게 아닐까. 노래교실 선생님은 의상마저 화려해서 내가 또 초라해보였다.

글쓰기도 웃음이 터지는 흥겨운 순간이 있지만 한 시간 내내 반주가 깔리는 노래교실과 비할 수 없었다. '잘 쓰지 못해도 써봤어요'가 공통 후렴구 같다고는 하지만 진짜 노래가 주는 흥이 없으니 내가 괜히 미안해진다.

곰탕파 어르신의 말에 나는 다시 어깨를 폈다. 들리지 않는 리듬도 있다는 걸 믿기로 했다. 트로트가 몸을 흔들게 한다면 글쓰기는 마음을 서서히 흔든다. 흔들린 마음이 우리 안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다양한 복지관 프로그램 중 글쓰기 반 멤버끼리 유난히 친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게 그 증거다.

함께 쓰기는 합창이다

글은 언제나 같은 길로 오지 않는다. 어떤 글은 순식간에 후루룩 도착하고, 어떤 글은 며칠을 뭉근히 삭이다가 제 속도로 찾아온다. 얼른 썼다며 건네는 글에도, 오래 묵혔다 꺼낸 글에도 각자의 결이 있다.

글쓰기 교실에 흐르는 침묵은 결코 공백이 아니었다. 마음속 어딘가를 더듬는 손길들이 겹쳐져 만들어지는, 소리 없는 합창이었다.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리듬이다.

선생님 만난 게 복이라는 말은 내 능력이 아니었다. 같이 만든 소리 없는 리듬을 오래 듣고 난 뒤에야 나오는 단어다. 그런 단어를 더 많이 찾고 싶다. 내가 이 수업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추가됐다.

집중하시는 어르신들 각자의 글을 스크린에 띄우고 낭독한다
▲집중하시는 어르신들 각자의 글을 스크린에 띄우고 낭독한다 최은영
덧붙이는 글 개인 SNS에도 올라갑니다
#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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