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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혹함을 증언해야" 태평양전쟁에서 돌아온 한 일본군의 다짐

[인터뷰] 아버지에 이어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운영하는 타케토미 지카이 관장 "전쟁은 모두를 앗아가"

등록 2025.07.05 11:23수정 2025.07.0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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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전쟁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친과 모친에 이어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관장을 맡고 있는 타케토미 지카이(75)씨. 그는 이곳을 찾는 학생들의 사진과 그들로부터 받은 감사패를 보여주며 "평화는 소중하다. 전 세계 아이들에게 전쟁 없는 국가를 물려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전쟁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친과 모친에 이어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관장을 맡고 있는 타케토미 지카이(75)씨. 그는 이곳을 찾는 학생들의 사진과 그들로부터 받은 감사패를 보여주며 "평화는 소중하다. 전 세계 아이들에게 전쟁 없는 국가를 물려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관식

"좋은 전쟁은 없습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최대의 죄악입니다. 일본을 보면 모르겠습니까?"

전쟁의 참혹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현 코타케 마을의 작은 전쟁자료관을 지키는 타케토미 지카이(武富慈海, 76) 관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동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오늘, 그는 "전쟁은 밑에서부터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후쿠오카현 코다케 마을에는 사설로 운영되는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33.12 제곱미터 또는 10평에 채 해당되지 않는 공간이다. 관장인 타케토미 지카이씨는 아버지 타케토미 토미오(武富登巳男, 작고), 어머니 타케토미 토모코(武富智子, 작고)에 이어 운영하고 있다. 입장료는 없다. 전쟁의 참혹함을 후세에 끊임 없이 알려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아버지의 유지 때문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곳에서 태평양전쟁이라는 1941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의 참혹했던 5년이라는 압축된 시간의 파노라마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순간 그는 "전쟁은 어떤 이유에서도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타케토미씨는 어떤 사연이 있어 이곳을 대를 이어 운영하는 것일까?

 후쿠오카현 코타케 마을에 위치한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33.12 제곱미터 또는 10평에 해당이 채 되지 않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 놓은 전쟁의 상흔과 흔적이 의미하는 가치는 그 이상이다.
후쿠오카현 코타케 마을에 위치한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33.12 제곱미터 또는 10평에 해당이 채 되지 않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 놓은 전쟁의 상흔과 흔적이 의미하는 가치는 그 이상이다. 김관식

"눈으로만 봐서는 모릅니다. 직접 만져보고 체험해야 해요"

한국에서 전화로 방문을 예약하고 찾은 6월 말의 일본은 30도에 가까운 더위와 이른 장마 특유의 습도로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코타케(小竹)는 올 들어 두 번째 찾는 지역이었다. JR 큐슈 철도 노선인 후쿠호쿠유타카 열차를 타고 코타케 역에서 내려야 했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 정거장을 지나쳐버렸다. 예약 시간인 오후 2시를 넘길까 대기하던 택시를 급히 잡아타고 5.3km 거리를 달렸다. 요금은 3550엔(약 34000원).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이정표가 스치듯 보여 하차했다. 곧 모습을 드러낸 자료관. 두어 번 문을 두드리자 타케토미씨는 환히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는 "더우니 어서 들어오라"며 에어컨 바로 앞에 놓인 의자로 나를 안내했다. 몸이 다소 불편해 보이는 그는 방명록을 내밀었고, 나는 이름과 국적, 전화번호를 적었다.


방명록을 살펴보니 틈틈이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취재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고, 해외는 물론 인근 중고등학교에서도 견학을 오는 듯했다. 그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전쟁의 참상을 바로 알고, 누구도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공감하기 때문 아닐까.

타케토미씨는 '손으로 만져보세요. 총을 들어보고, 군화를 신어보세요. 그 무게와 참혹함을 알아주세요'라고 적힌 작은 안내문을 들고 와 설명했다. 상당히 특이했고, 그 이유를 내심 이해했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긴장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줄곧 전쟁에 동원된 병사(군인)와 서민은 참혹함만 겪는다"고 말했다. 결국 남는 건 유서와 유품뿐. 그것 하나하나에는 슬픔과 분노가 담겨 있다고 했다. 이곳의 모든 전쟁 유물을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하는 이유도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느껴보라는 이유에서라고. 그건 결코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그는 이곳을 세운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자료관 내부 모습. 전투 중 총알 등으로 실제 일본군이 썼던 훼손된 철모(왼쪽)와 필리핀 레이테만 전투 전사자 유품(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90%가 전사했다.)
자료관 내부 모습. 전투 중 총알 등으로 실제 일본군이 썼던 훼손된 철모(왼쪽)와 필리핀 레이테만 전투 전사자 유품(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90%가 전사했다.) 김관식
 130cm에 달하는 38식 보병총. 한 손으론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게감이 있고 길었다. 실제 러시아와 교전 시 사용했다는 사진이 옆에 보인다.
130cm에 달하는 38식 보병총. 한 손으론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게감이 있고 길었다. 실제 러시아와 교전 시 사용했다는 사진이 옆에 보인다. 김관식

조선인 강제 동원 노무자에 관한 사료도

타케토미씨는 "마침 자세히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여러 문서가 담긴 파일 여러 개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타케토미씨는 다른 전쟁 유물보다도 당시 '조선인'과 관련한 실증적인 자료부터 먼저 보여줬다. 바로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이 노역에 강제동원된 역사적 사료였다. 자료는 꽤 두툼했다. 쇼와 19년(1944년) 3월에 특별고등과(당시 일본의 정치경찰조직)가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이입(移入) 반도인(半島人,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였다.

 이입 반도인(半島人,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쇼와 19년, 1944년)
이입 반도인(半島人,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쇼와 19년, 1944년) 김관식
 '미츠이 야마노(三井山野) 광업소 제1갱 신야부 반도합숙소'에 대한 설명과 합숙소 내부 그림. 오른쪽 상단 꼭대기에 실제 모형 사진이 한 장 보인다. 둘러세운 벽돌 사이로 입구가 하나만 보인다. 조선인은 당시 이곳에 숙박하며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미츠이 야마노(三井山野) 광업소 제1갱 신야부 반도합숙소'에 대한 설명과 합숙소 내부 그림. 오른쪽 상단 꼭대기에 실제 모형 사진이 한 장 보인다. 둘러세운 벽돌 사이로 입구가 하나만 보인다. 조선인은 당시 이곳에 숙박하며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김관식

이어 '미츠이 야마노(三井山野) 광업소 제1갱 신야부 반도합숙소'라 적힌 설명과 숙소 입체도를 보여주며 설명을 이었다. 타케토미씨는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많은 석탄이 필요했고, 노동자도 더 많이 요구됐다"면서 "당시 노역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5070명에 달했고, 모두 이곳에 수용해 강제 노역했다"고 말했다. 이어 "여길 보라. 다다미 1장 당 1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자리였다"면서 "무엇보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을 감시하는 데 용이하도록 입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고 말했다. 내용을 살피니 조선인 합숙소 주위 담벼락 높이를 7척(2.3미터)으로 높이고, 250미터에 달하는 철조망을 둘렀다고 적혀 있었다.

이 사료대로라면 조선인은 강제로 동원됐고, 사실상 감금돼 강제노역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매번 세계유산위원회에 세계유산으로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이 포함된 근대산업시설에 대해 "강제로 일했다"가 아닌 "일하게 됐다"는 식으로 바꿔 쓰며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줄곧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일본의 왜곡된 주장과 날조된 역사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타케토미 씨는 이것 역시 지속적으로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전쟁에 몸서리쳤다

그의 아버지 타케토미 토미오는 육군 이등병으로 출정, 종전까지 무려 9년 동안 버마(현재 미얀마)와 만주를 전전했다. 특히 만주에서는 영하 30도 안팎의 추위와의 싸움도 이겨내야 했다고. 관장 시절 관람객들이 찾아오면 "사람도 동물도 생명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 생명을 소중히하고 평화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전쟁을 단호히 말려야 해요. 각 나라의 모든 사람이 사이좋게 사는 것이 이 자료관의 목적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만주 전선의 영하 30도 혹한 속에서도 반드시 살아 돌아가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틈틈이 전우들의 유서와 유품을 비롯해 전쟁 관련 자료 6000여 점을 모았고, 마침내 1979년, 전쟁자료관을 세워 반전의 기틀을 삼고자 했습니다.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온 세상에 알리기로 했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의 뜻을 알고 다른 전사자 유족이 여러 유품을 건넸고, 히로시마 원폭 당시 피폭, 파열됐던 동전, 유리컵 등도 함께 자료관에 전시하고 있다.

 타케토미 지카이 관장의 아버지 타케토미 토미오. 그는 만주와 버마(미얀마) 전선에 투입돼 치열한 전쟁을 경험했다. 이 자료관은 그의 의지에 따라 설립한 것이다.
타케토미 지카이 관장의 아버지 타케토미 토미오. 그는 만주와 버마(미얀마) 전선에 투입돼 치열한 전쟁을 경험했다. 이 자료관은 그의 의지에 따라 설립한 것이다. 타케토미 지카이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한두 걸음을 떼자, 구멍이 숭숭 뚫린 철모를 시작으로 종군 간호사의 물품, 군복, 방한 외투, 필리핀 레이테만 전투 당시의 탄피와 깨진 안경 등 전쟁의 참혹한 흔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녹슨 약품통과 휘어진 숟가락 앞에서는 발길을 쉽게 뗄 수 없었다. 무게만 1kg에 달하는 철모를 만져보고, 적과 가까운 곳에서 육탄전을 벌일 때 사용했던 무게 4kg, 길이 130cm에 달하는 38식 보병총을 직접 들어보며 참혹한 전장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총을 손에 꽉 쥐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전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 "모든 전쟁은 인간의 옹졸한 마음에서 생겨난다. 이런 건 모두의 힘으로 단호하게 멈추도록 해야 한다"며 "평화롭고 싶다고? 그러면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의 평화헌법은 정말 중요하다. 이 헌법을 오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 나, 타케토미 토미오는 다음 세대에 이것이 이어지도록 하는 마음뿐"이라고 두고두고 당부했다고 한다.

군수품 부족에 기르던 '개, 고양이'도 군수품으로 공출

 군수용 모피로 공출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고양이 수령증(왼쪽)과 반려견의 헌납을 호소하는 회람판
군수용 모피로 공출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고양이 수령증(왼쪽)과 반려견의 헌납을 호소하는 회람판 김관식
 군수용 모피를 공출 받아 만든 병사용 방한 외투와 군화. 특히 방한 외투 1벌에 반려견이나 고양이 4마리 정도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밖에 토끼와 양, 염소털 등도 사용됐다고 한다.
군수용 모피를 공출 받아 만든 병사용 방한 외투와 군화. 특히 방한 외투 1벌에 반려견이나 고양이 4마리 정도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밖에 토끼와 양, 염소털 등도 사용됐다고 한다. 김관식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물자가 부족해지자 가족처럼 기르던 '개와 고양이'도 군수품으로 간주한 것이 놀랍고 안타까웠다. 1944년, 일본 정부는 군수성 화학국장과 후생성 위생국장 명의로 전국 지방장관(지사)들에게 개 공출을 지시하는 통지문을 보냈다. 명목은 모피 증산과 광견병 근절이었다.

이곳에는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무엇이 무엇이든 여러분의 개를 나라에 헌납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회람판은 1944년 12월 도쿄 하치오지 시청이 개 공출을 안내하며 내건 것이다. 하치오지 장년단과 경찰서 명의로 작성된 회람판에 "개는 중요한 군수품으로서 훌륭한 도움이 됩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그렇게 전쟁 관련 유품을 직접 만지고 느끼고 나니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는 내게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는지, 어디를 가봤는지 물었다. 또 "전쟁이 비극인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전쟁 고아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며 "전쟁에 관한 책은 많다. 그러나 전쟁을 반대하며 호소하는 목소리는 작다. 쇼와 시대 전쟁(태평양전쟁)의 역사를 꼭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마치 언제 또 만날지 모른다는 듯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끝까지 구슬프게 불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이란 무력 충돌, 중국의 대만 침공 우려까지 겹치며 전 세계가 전쟁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전쟁 상처를 떠올려야 한다. 숨기지 말고. 잊어서도 안 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전쟁과 분쟁은 과거의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군사 사상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적을 굴복시키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하지 않았나.

비록 이곳에서의 1시간 남짓이었지만 '아무리 비싼 평화도, 전쟁보다 낫다'는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귀국 후 문득 돌아보니, 이곳이 '기념관'도, '평화회관'도, '박물관'도 아닌 '자료관'인 이유가 조금은 이해될 것 같았다. 전쟁의 참혹함을 미화하지도, 포장하지도 않은 채 오롯이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남기고자 했던 건 아닐까.

※ 병사·서민 전쟁자료관
주소 : 415-7 Gotoku, Kotake, Kurate District, Fukuoka 820-1101 일본(구글맵)
개관시간 : 오후 1시 30분~5시(매주 수/목 휴관)
관람료 : 없음
예약필수 : +81949628565
덧붙이는 글 일본은 과거 전쟁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고통받고 희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려던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타케토미 씨 같은 이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그들을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은 자료관에서 만난 평화의 외침이 독자들에게도 겸허하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병사서민전쟁자료관 #태평양전쟁 #타케토미지카이 #조선인강제노역 #군수용모피공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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