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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반대 무릅쓰고, 교육도시 청주를 선택한 이유

[한국전쟁과 이후를 살아온 여성 삼대의 삶 ③] 도시에서 살아내기

등록 2025.06.30 11:30수정 2025.06.3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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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부모를 잃고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살아온 1944년생 여성의 기억을 담은 회고록입니다. 무참히 희생된 아버지와 끌려간 어머니를 떠올리며 울고 떨던 비극 속에서도, 한 여장부의 헌신과 사랑이 한 아이의 삶을 어떻게 지탱했는지를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전합니다. 이 글은 20여 년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리는 데 힘써온 박만순 작가(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권유로 썼습니다.[기자말]

정영자 가족 정영자 내외와 사남매
▲정영자 가족 정영자 내외와 사남매 정영자

공기 좋고 물 맑은 월악산 아래 오지마을, 충북 제천군 한수면 복평리는 엄마가 뿌리내리고 살아온 곳이다. 나와 동생은 외할머니가 세상을 뜨신 후 외지로 떠돌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엄마 집을 찾아왔다.

그곳에서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한동네 남성과 결혼을 했다. 어릴 적에는 외할머니 덕으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고 그곳에서 결혼까지 했으니 한수면 복평리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이 곳에 살면서 사연도 많고 기쁨도 웃음도 많았었으나, 1980년대 충주댐 건설로 수몰 마을이 되면서 우리는 떠나야 했다. 가난으로 못살기는 했어도 정을 나누며 울고 웃던 이웃들과 살길 찾아 각 지역으로 뿔뿔이 헤어지려니 마음이 울컥했다.

한편에서는 수몰 보상금이 나오자 술집에서는 아가씨들을 데려다 놓고 장사를 했다. 그 바람에 노름꾼도 판을 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집안이 산산조각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도 수몰 보상금이 나오기 전에 남편과 상의를 했지만 서로 의견이 달랐다. 남편은 강원도로 가서 땅을 사서 농사를 짓자고 했고, 나는 청주가 교육 도시란 말을 들어서 청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 말을 안 듣고 강원도로 간다기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청주에 사는 주말부부 학교 선생님 부인에게 통사정을 했다. 그 부인의 남편은 복평초등학교 교사로 우리 집에서 하루 세끼를 먹고 있었다.

"남편이 강원도로 가자는데, 나는 청주가 교육 도시라 하니 청주 갈 때 나 좀 데리고 가서 집 보는데 같이 좀 봐주세요." 그렇게 해서 난생처음 사모님을 따라 청주에 가서 집을 보았다. 그런 연후에 남편한테 집을 보고 왔으니 한번 가보자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황소고집이었다. 강원도 가서 땅을 많이 사서 부자로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시니어 시니어 사업단에서 교복 수선하는 정영자
▲시니어 시니어 사업단에서 교복 수선하는 정영자 정영자

농사를 많이 지으면 부자 소리는 들을지 몰라도 땅 많다고 저절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닌데. 그 헛된 욕심에 나는 실망했다. 시집을 와서 농사를 지어본 나는 남편 말만 듣다가는 내 인생을 흙에 묻히고 자식들 공부를 어떻게 시킬지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내 고집대로 혼자 청주를 쫓아다녔다.

그러다 수몰 보상금이 나왔다며, 조합 빚을 다 갚고 나니 1천만 원이 채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남편은 노름꾼 친구들과 어울려서 충주를 드나들며 밤을 지새우고 올 때도 있어서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서로 잠시 생각이 엇갈렸으나 기분을 풀고 남편 마음을 달래서 겨우 청주를 한번 데리고 와서 복덕방 아저씨 따라 집을 보러 다녔다.

내가 먼저 와서 하숙이라도 하려고 청주대학교 주변 집을 보았으나 돈이 부족해서 이번에는 서원대학교 쪽으로 와서 보게 되었다. 이쪽은 아직 동산 위에 학교 건물 하나 덜렁 있고 슬라브 집 7채뿐이었고 주변은 논밭에 판잣집뿐이었다.

그나마 학교 밑에 슬라브 집으로 제일 싼 비탈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본 남편은 집 앞이 시원해서 좋다며 계약을 하자고 했다. 나는 아직 해가 있으니 한 집만 더 보자 했다. 그런데 남편은 "여자는 남자 일에 나서지 말라"며 계약서를 작성했다. 거기서 우기다가는 안 될 것 같아서 말 한마디 못하고 남편 하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남편은 청주에 집을 사주었으니 어떻게 살 거냐고 해서, 나는 "이사하면 먹는 것은 내가 벌어먹일 터이니 자식들 학비나 대라"고 했다. 남편은 이사 와서 집 소개해준 복덕방만 다니며 1~2년을 놀고먹었다. 어쩌다 꿈에 떡 맛보듯 집 뜯는 일(집 철거)을 했지만 그것으로는 술값도 부족했다. 나중에는 나도 사람인지라 속이 터져 한마디 하면 "사람을 사귀어야 일을 한다"고 하기에 3년을 참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어린이 태우는 말 마차를 해보란다'며 이야기를 해서 없는 형편에 20만 원 거금을 들여 사주었다. 1984년도의 일이다. 그랬건만 3일 끌고 갔다 와서 집 앞에 세워놓고 또 복덕방으로 출근했다.

그때 나는 내가 한 말에 책임지려고 하우스 밭도 매고 남의 집 일도 해주고 리어카를 빌려서 시골에서 농사지어온 콩으로 두부도 해서 팔아가며 일을 하다가 세워둔 말차가 아까워서 내가 끌고 다녀보았다.

1년을 끌고 다니다 보니 푼돈이지만 자식들과 사는 데 보탬은 되었다. 하지만 내 몸이 안 따라주어서 할 수 없이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YMCA에 찾아가서 식모 일을 했다. 그렇게 밤늦도록 일하고 집에 오면 "어디 가서 무슨 짓 하고 왔냐"며 술 취해서 말하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옷을 싸 달래서 스스로 집을 나갔다. 그러니 자식들도 마음 놓고 웃고 떠들고 나 역시도 앓던 이가 빠진 듯 마음이 편했다. 늘 일하고 집에 오면 술 취해서 자거나 밤늦게 비틀거리며 들어와서 하는 말이 "네가 청주에 집 사주면 벌어먹인다"고 했으니 자기 일에 간섭하지 말라 했다. 나로서는 늘 죄인이 된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다 집 나간 후 한 달에 한 번씩 오면 빨래만 던져놓고 2~3일 술만 마셨다. 그러다 갈 때는 쓰고 남은 돈을 방바닥에 던져놓고 갔다. 나는 그것도 감지덕지로 저축했고 공부하려는 자식은 가르치고 공부 하기 싫어하는 자식은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했다. 그래도 4남매가 똘똘 뭉쳐 속썩이지 않고 잘 자라 준 자식들이 고마웠다.

그렇게 나가서 일하던 남편은 술 담배 때문인지 당뇨로 자주 쓰러져서 몇 년 나가서 살다 와서 환갑 지나고부터 일손을 놓았다. 그렇게 막내 하나 남기고 자식들 모두 결혼시키고 나니 내 몸에도 잔병이 찾아왔다. 와사풍을 고치고 나니 심장이 막혀서 자식들 애간장을 녹이다가 다시 식당 일을 했다.

그런데 식당에서 뜨거운 감주를 끓여서 들다가 미끄러져서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서울 한강 성심 병원에서 1년 넘게 입원 후 동생 집에서 통원치료 4년을 오가며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수몰 #교육도시 #말차 #식모 #와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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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도에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전 아버지가 빨치산을 도왔다는 혐의로 대한민국 군경에게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고 애기업개, 식모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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