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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 없이 춤을 추듯... 블루베리 파이 이렇게도 만듭니다

맘껏 자신이 되는 일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열매를 보며 한 결심

등록 2025.07.05 18:22수정 2025.07.0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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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 초 내가 사는 서울 성동구에서 대여해 주는 텃밭을 신청했다. 운 좋게 당첨되어 3평 남짓한 땅을 배정받았다. 3월 초에는 땅을 갈아엎고 퇴비를 주었고 4월 한식(4월 5일) 지나 상추와 방울토마토, 오이와 가지, 호박과 수박 모종을 심었다. 틈틈이 잡초를 뽑고 물을 주었더니 4월 말부터 상추를 수확할 수 있었다.

5월 초에 방울토마토에 열매가 맺힌 걸 확인했고 5월 말이 되자 오이와 호박, 가지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 만한 열매가 달렸다. 6월부터는 오이와 호박, 가지를 수확해 먹는다. 오이는 깨끗하게 씻어 총총총 잘라 그냥 먹어도 은은한 단맛이 입안을 채운다. 사 먹는 오이와는 맛의 농도가 다르다. 땅의 기운이랄까, 태양의 강렬함이 응축된 맛이다.


작물을 키우고 그걸 따 먹는 재미와 맛까지 알게 된 터에 지난 주말엔 블루베리를 따러 오라는 언니의 연락을 받았다. 언니는 집 앞에 텃밭을 가꾼 지 오래고 그 텃밭에는 블루베리 나무 대여섯 그루가 있어 이즈음이면 블루베리 수확으로 바쁘다. 주말 사이 집을 비운다며 시간이 되면 와서 따가라고 했다. 핸드폰으로 전송된 사진 속 블루베리 알이 보랏빛으로 탐스러웠다.

블루베리를 따러 가려면 반나절 사이 왕복 3시간 거리를 오가야 했다. 예전이라면 비효율적으로 여겨져 사양했을 일. 잠시 고민하다 집을 나섰다. 블루베리 과실을 얻는 것보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한 해를 기다린 열매를 때를 놓쳐 땅에 떨어지게 하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텃밭 농부 3개월 차, 수확의 맛을 알게 된 이의 변화다.

목적이 바뀌면 가치도 바뀐다

블루베리 언니네 텃밭엔 블루베리가 익어간다. 익을수록 보라빛 위로 부연 막이 생긴다.
▲블루베리 언니네 텃밭엔 블루베리가 익어간다. 익을수록 보라빛 위로 부연 막이 생긴다. 김현진

목적이 바뀌면 가치도 바뀐다고, '텃밭을 가꾸는 시인' 긴이로 나쓰로는 말했다. 가치가 바뀌면 어떤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싫어하는 것도 소중해지고 꺼리던 일도 하고 싶은 게 된다. 그걸 경험하면 삶의 모든 순간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변화란 꼭 엄청난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살펴보면 우연한 기회, 뜻밖의 만남이 자연스러운 변화로 이어진 일이 더 많다. 비효율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귀찮음을 무릅쓰며 블루베리를 따러 가는 나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놀랐다. 자연이 맺어주는 생명의 가치를 알아 그걸 귀하게 여기는 내가 좋았다. 그런 나를 보랏빛 열매들이 싱그럽게 맞아주었다.


블루베리는 보라색이 짙어질수록 희고 부연 막이 생긴다. 그러한 변화도 신비로웠다. 안으로 짙어질수록 겉면은 흐려진다니. 외부로 강렬함을 내뿜는 대신 내면으로 깊숙이 모아내는 모습은 겸허하고 자족적인 아름다움처럼 보였다. 열매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따며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을 음미했다. 단단한 아름다움이라는 감촉, 나무 한 그루가 한 해 동안 그러모은 힘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블루베리는 흙과 공기, 햇빛과 바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힘껏 빨아들여 자신을 키운 뒤 그 삶의 형태를 열매로 지어낸다. 그걸 우리에게 선물한다. 생명을 지니고 산다는 건 이런 의미구나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배워 열심히 성장하고 가장 좋은 내가 되기. 맘껏 나로 자라 건강하게 존재하기.


그러다 보면 주변으로 즐거운 기운을 퍼뜨릴 수 있고 기회가 닿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나로 존재하다 내 삶으로 지은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고 식물은 알려준다.

블루베리 한 바구니를 수확하니, 생과로 먹고도 남은 양이 많았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블루베리 나무가 자신으로 살아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이 내게 건넸던 기쁨이 떠올랐다. 맘껏 자신이 되는 일로도 누군가에겐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신비로운 이치를 깨달았던 순간. 그러니 나도 이걸 맘껏 써 보고 싶었다.

정해진 레시피나 규칙 없이, 지나치게 각 잡지 않고, 즉흥적으로 춤을 추듯 요리해 보자고. 그러기엔 파이만 한 게 없을 것이다. 밀가루와 버터, 소금, 설탕 약간을 넣어 반죽해 둔 파이지가 이미 냉동실에 있었고(파이지는 미리 만들어 냉동 보관해 두면 베이킹이 훨씬 쉬워진다).

쓱쓱 파이지를 밀어 편 후 얼마 전 만들어 두었던 블루베리 잼을 펴 발랐다. 그 위로 남아있던 생과를 모두 쏟은 뒤 설탕을 솔솔 뿌려주었다. 이번에는 성형 틀도 없이 그냥 굽는다. 파이지 위에 올린 과일이 떨어져 내리지 않게 가장자리를 접어 납작한 바구니처럼 모양을 잡고 가장자리에는 포크로 모양을 내었다.

틀 없이 굽는 파이는 처음이라 망설여지던 찰나엔, 이런 마음이 찾아왔다.

'뭐 어때, 맘껏 한 번 해보는 거지!'

나도 나로 힘껏 살아보고 싶다

블루베리파이 뭐 어때, 하면서 내 맘껏 만든 블루베리 파이. 성형 틀 없이 파이지를 바구니처럼 접어 만들었다.
▲블루베리파이 뭐 어때, 하면서 내 맘껏 만든 블루베리 파이. 성형 틀 없이 파이지를 바구니처럼 접어 만들었다. 김현진

처음 베이킹이 좋았던 건, 레시피를 철저히 지키면 웬만해선 실패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틀에 갇힌 레시피가 답답했다. 베이킹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그랬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일정한 규칙을 따르면 되는 일에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 안정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반대 욕구도 따라다녔다.

예측 가능한 일에는 뜻밖의 즐거움과 우연한 선물이 끼어들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정답만 찾던 삶에서 벗어나 틀리고 싶고 깨고 싶고 달라지고 싶었다. 그건 지금의 나로 안주하지 않고 계속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연결되었다.

새로운 가치를 찾아 변화하고 싶었다. 낯선 세계를 발견하여 나라는 좁은 세계를 넓히고 싶은 욕구, 그러면서 내 멋대로 자유롭고 싶다는 바람이 내면에서 꼬물거렸다.

조금씩 그런 시도를 해왔던 것 같다. 나만의 방식, 나만의 삶을 찾기 위해 더디게 길을 찾아가는 여정. 실패하면서 배포와 용기가 조금씩 늘었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으며 타인은 다른 이의 삶에 그리 관심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드넓은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은 보잘 것 없는 풀 한 포기에 지나지 않는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구석에서도 식물은 자신으로 있는 힘껏 살아간다. 오직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생명을 다하는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게 생명을 지닌 존재의 의무이자 삶의 이치다.

블루베리 파이가 완성되었다. '뭐 어때', 했던 시도가 예쁘게 구워졌다. 마침 딸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불러 파이를 나누어 주니 맛있다며 떠들썩하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나무의 마음도 이런 걸까 짐작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글굽는오븐 #블루베리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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