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에서〉 표지
한그루
동시대의 웹툰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력과 묘사력을 등한시했다면, 이 작품은 기존의 웹툰 문법을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지점에 다가가고자 한다. 현미경처럼 세세하게 보여주는 방법론을 선택해 제주도 해녀의 삶을 차갑게 그려낸다.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물질하며 살아가야만 했던 한 해녀의 삶을 담담한 흑백 톤으로 그려낸다. 해녀 일을 했던 엄마와 그 일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텍스트에 그려진 이 시간의 기록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자들은 제주도 해녀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요즘은 젊은 해녀를 제주도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로 인해 펼쳐진 삶의 기록은 값진 의미를 지닌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그곳에서>는 말풍선도 효과음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무작정 칸의 나열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시대를 구분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내보인다.
말풍선(언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흉터'라든지 '점'과 같은 표시를 활용해 인물의 '차이'를 뚜렷이 구분한다. 그러니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다.
작가는 이름을 명명하지 않았을 뿐이지,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정 표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인물을 충분히 그려낸다. 그리고 이런 표현의 대상은 다름 아닌, 해녀인 엄마와 해녀가 된 딸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 현홍아선이 그린 그림과 칸의 서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 대를 잇는다는 것
이 작품은 1940년대 제주도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운다. 이 행위가 어떤 제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해녀에게는 사건 사고 없이 물질을 할 수 있도록 바다신에게 염원하는 행위로 읽힌다. 해녀 일은 이처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된 노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41년의 기록에는 한 해녀가 물질하다가 다급하게 수면으로 올라와 아이를 낳는 장면이 그려진다. 이웃 해녀들은 급하게 다가와 출산을 돕는다. 만삭인 임산부가 물질하러 바다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해녀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아이를 낳은 엄마는 눈과 눈 사이에 점을 가졌다.
1942년에는 이 여성이 낳은 아이가 성장하는 장면이 담긴다. 이 아이는 엄마의 일터인 바닷가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주변을 맴돈다. 이때 실수로 넘어져 단단한 현무암에 이마가 찢어진다. 이 사고로 오른쪽 눈썹에 흉터를 얻는다.
이 아이가 해녀의 삶을 자진해서 선택한 것인지 먹고 살기 위해 해녀의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이는 엄마를 닮아 바다의 삶을 선택했다. 그녀는 물질하러 바다 깊이 잠수한다. 해녀 일은 이처럼 대를 잇는 직업으로 묘사된다.

▲ 〈그곳에서〉의 한 장면이다. 오른쪽 얼굴에 흉터 있는 아이가 물질을 하기 위해 바다에 잠수하는 장면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칸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짙은 검은색으로 변화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검은색 칸이 끝나고 난 뒤, 아이는 성인 해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수면 위에 오르는 순간 어른이 되어 있다. 이는 한 아이가 해녀로 성장하는 시간을 만화의 형식으로 연출한 것이다.
한그루
아이가 엄마를 따라 해녀가 되는 시간의 여정은 이 텍스트에서 가장 값진 장면이다. 작가는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간의 무게를 어두운 곳에서 점점 밝아지는 연출 속에 녹여낸다. 이는 칠흑 같은 바다에서 해녀가 물질을 끝마치고 수면 위로 올라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이 찰나의 시간을 성장의 시간과 겹쳐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간의 연출은 직업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연출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모녀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함께 물질하다 엄마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흉터를 가진 해녀는 그 이후로 오랜 시간 악몽에 시달린다. 그곳에서 엄마를 잃고 난 후,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해녀로 산다는 것은 해녀로 살아가야'만'하는 것이다.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어서 육지로 가지 못하니, '이곳'에 남아 물질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해녀의 삶이 선택된 삶일 수도 있어서 쓸데없는 연민은 폭력적일 수 있지만, 현홍아선의 〈그곳에서〉는 연민의 흔적이 잔잔하게 담겨 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이 공간을 마주한 채 다시 잠수를 시작한다.
깊이 잠수하면 잠수할수록 값비싼 전복과 소라를 찾을 수 있으니, 해녀들에게 숨을 참는 것은 미덕이다. 건강하고 힘이 센 흉터 있는 여성은 깊이 잠수한다. 그때 암초로 인해 위험을 겪는다. 생사가 오간다.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던 엄마가 나타나 그녀를 돕는다. 흉터 가진 여성은 갑자기 나타난 엄마로 인해 소중한 목숨을 구한다. 그녀는 그 이후로 힘을 내 바닷속에서 해녀의 삶을 굳건히 살아간다. 엄마는 곁에 없지만 늘 곁에 있다.
3. 현미경으로 묘사하기
그래픽 노블 <그곳에서>를 제작한 현홍아선에게 제주도에서 해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목숨을 건 노동을 가난하게 견디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지금은 예전 같지 않겠지만, 과거의 기억은 해녀의 삶이 힘겨웠음을 보여준다. 만화가는 이 여정을 세밀한 묘사를 통해 담는다.
아무래도 이 텍스트의 가장 큰 장점은 동시대의 만화 기법과는 정반대로 재현되는 세밀한 표현 방법일 테다. 이 방법론으로 현홍아선은 과거를 복원한다.

▲ 〈그곳에서〉 중 해녀들이 물질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다. 해녀들은 서로의 옷을 만져주며 동료들을 돕고 있다.
한그루
해녀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물질하기 위해 바다를 살피는 과정은 협동심을 강조하는 해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림으로 인해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상의 삶을 기억하게 만든다. 특히, 얼굴에 점이 있는 여성이 아이를 낳는 장면이 그렇다. 삶과 죽음을 운명적으로 쳐다보게 한다.
현홍아선은 이런 성실한 작법을 통해 잊혀서는 안 되는 노동하는 해녀의 삶을 재현한다. 이 과정에서 아픔과 상처를 품는다. 욕심부리지 않고 바다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해녀의 삶을 애써 기록한다. 이 과정을 정성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모든 웹툰이 한곳을 향해 질주하는 이 시대에 수작업으로 완성된 그래픽 노블의 실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곳에서 In There - 돌 바람 해녀
현홍아선 (지은이),
한그루,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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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를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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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없이도 알 수 있는, 대를 잇는 해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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