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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5.07.01 12:05수정 2025.07.01 12:05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털중나리 .
박병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해발 700미터 산골에서 보냅니다.
6월 3일 오후 5시 20분, 앞마당 손바닥 정원입니다. 재작년에 영입한 '털중나리'가 오밀조밀하게 봉오리를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한 줄기 한 둥지에서 10개 이상 되어 보이는 아기 봉오리들이 세상을 향해 존재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아흐레가 지난 6월 12일 오전 9시, 털중나리는 아기 봉오리를 제각각 독립시키려는 듯 봉오리와 봉오리 사이를 줄기로 넓혀 주었습니다. 오른쪽에 먼저 피어난 하늘나리가 핏줄 하나를 곁에 두고 어서 피어나라며 응원합니다. 털중나리 가족이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네요.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18일 오후 6시 14분, 열넷 가족 중 맨아래 봉오리 색깔이 다른 봉오리와 다르게 느껴집니다. 개화의 징조입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1일 오후 12시 29분, 아래쪽 봉오리들이 놀랄 만큼 색감을 달리합니다. 초록빛 봉오리들이 주황색으로 변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2일 오후 3시 36분, 세상에 이럴 수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3시간 전만 해도 봉오리였는데, 맏봉오리로 보이는 한 쌍이 우주의 문을 열고 환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하늘나리처럼 하늘을 향하지 않고, 털중나리 특유의 몸짓으로 땅을 향해 피어납니다. 아아, 남은 열두 봉오리는 언제쯤 피어날까요.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3일 오전 9시 33분, 두 번째 개화를 이룬 털중나리는 사진 찍는 사람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합니다. 열두 꽃봉오리 중 네 송이 꽃을 피워낸 털중나리 사진을 수십 장 찍습니다. 그날 밤, 흥분에 흥분을 거듭하며 컴퓨터에 사진을 옮깁니다. 좋은 사진 한 장만 남기려고 삭제를 거듭합니다. 아뿔싸! 하마터면 다 지울 뻔했습니다. 딱 한 장 남는 순간에 삭제 버튼을 누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버릴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4일 오후 6시 12분, 두 봉오리씩 두 차례 피어나더니 이번에는 한 봉오리만 피어납니다. 열넷 아기 중 다섯 아기를 세상에 내놓은 털중나리는 여세를 몰아 금방이라도 꽃을 피우려는 듯 봉오리 색감에 긴장감을 줍니다. 찍는 이는 애간장이 탑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5일 오전 7시 28분, 비가 내렸습니다. 바람은 불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래 다섯 송이와 다른, 아직은 꽃잎을 말아 올리지 않은 두 송이가 보입니다. 같은 날 11시 59분 모습을 보세요. 두 송이도 머리를 올려 개화식이라도 하나 봅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6일 오전 7시 26분, 이제 확실하게 구별하시겠죠? 맞습니다. 두 송이가 또 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홉 송이가 되었습니다. 열넷 봉오리 중 아홉 봉오리가 찬란하게도 피어나 빛납니다. 찍는 이의 욕심은 커집니다. 그래, 부디 열네 봉오리 모두 건강하게 피어나 한 장의 사진에 담게 해다오. 그렇게 피날레를 장식해 주렴. 같은 날 오후 7시 49분만 해도 희망이 보였습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7일 오전 6시 7분, 이른 아침에 다가섭니다. 맞습니다. 열 번째 꽃봉오리가 피어납니다. 오전 9시 4분에 한 컷을 더 담아봅니다. 이제 남은 건 봉오리 넷, 열네 송이 완전체를 상상하니 설레기만 합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8일, 오전 7시 8분. 설렘에 잠을 설치고 마당에 나섭니다. 두 봉오리가 더 피어나 모두 열두 송이 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11시 48분에 촬영을 하는데, 맨아래 6월 22일에 피었던 꽃송이가 시들어 보입니다. 부디 열네 송이 완전체가 될 때까지 버텨다오. 기도합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같은 날 오후 4시 27분, 열넷 봉오리 중 가장 먼저 꽃을 피운 두 송이가 위태롭습니다. 내일 아침 남은 두 봉오리가 피어날 때까지, 그리하여 열네 송이가 더불어 함께 핀 털중나리로 우뚝 서다오.

▲털중나리 .
박병춘
우리네 세상사가 내 마음대로 다 되는 건 아니라고 해요. 실감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같은 날 오후 7시 12분, 처음으로 피었던 두 송이 꽃잎이 뚝뚝 떨어지고 수술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모란이 뚝뚝 떨어진 것과 비교되지 않는 슬픔입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털중나리 .
박병춘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29일 오전 8시 1분, 열세 번째 봉오리가 입을 열고 아직은 머리를 올리지 않은 채 자신을 지탱하는 신세계와 마주합니다. 오전 10시 11분, 열세 번째 꽃송이가 싱그럽게 머리를 올리며 춤을 춥니다. 오후 6시 47분, 안타깝게도 한 송이가 더 꽃잎을 떨굽니다. 이제 남은 봉오리는 맨꼭대기에 하나! 아무래도 잠을 설쳐야겠습니다. 외등을 켜고 여러 번 마당에 나갑니다. 새벽까지 그대로입니다.

▲털중나리 .
박병춘

▲털중나리 .
박병춘
6월 30일 오전 7시, 맨꼭대기에서 열네 번째 봉오리가 피어났습니다. 아주 의젓한 막내입니다. 오전 10시 18분이 되면서 다른 꽃송이처럼 머리를 빗어 올립니다. 아아, 네 개 꽃송이가 막내의 개화를 지켜보지 못한 채 떨어졌군요.

▲털중나리 .
박병춘
열넷 봉오리가 완전체가 된, 한 장의 사진을 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쉽습니다. 시들어 떨어지는 꽃을 붙들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읽는 분들께서 마음 안에 완전체가 된 모습을 합성해 보세요.
유월을 관통하며 털중나리와 나눈 밀애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온통 짝사랑이었지만 열넷 꽃송이 모두 머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어 주었습니다. 비가 내렸고 바람도 불었지만 털중나리는 장엄하게 혈육을 지켜냈습니다. 꽃마다 펼쳐 낸 소리 없는 폭발음을 잊지 못합니다. 생명의 숨결이 제 호흡과 만나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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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간장 탔던 한 달 간의 밀애, 집 앞에서 이걸 목격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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