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의 수첩 영시와 한글 번역이 적혀 있었다
최은영
우리반 최고 언니는 1941년생, 여든네 살 어르신이다. 다들 왕언니로 모신다. 결석이나 지각 한 번 없이 매주 글을 써 오시기에, 나이를 떠나 태도 자체로도 그저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날 어르신은 영시 외우는 이야기에 대한 글을 써 오셨다.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한지 낭독이 끝나자마자 한 목소리로 그 시를 들려달라 그랬다.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W.H.Davies)의 'Leisure'라는 시였다. 수첩에 적은 영시를 내게 건네주신 어르신은 바로 낭송을 시작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는 어르신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레저의 숨은 뜻을 배우다
나는 암송하는 시가 없다. 학교 다닐 때 숙제로 박목월 시를 외웠던 거 같은데 기억나진 않는다. 그런데 영시라니... 너무 먼 이야기다. 살림과 육아와 일에 치이는 내게 영시 암송은 고슴도치에게 빗질 해주는 일 같았다. 백 번 빗질해 봐야 고슴도치 털이 부드러워질까. 그러니 하나마나한 일이다.
세상의 소음은 언제나 효율을 속삭인다.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날, 그분의 막힘없는 암송은 이상하게 오래 남으면서 묘하게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왜 모든 일을 쓸모로 재단했을까.
시의 제목을 새롭게 해석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Leisure(레저)라는 단어는 흔히 스포츠와 연결되지만 어르신 수첩에는 '여유'라고 쓰여 있었다. 영어 단어 Leisure는 라틴어 licēre(허용하다)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대 프랑스어 leisire를 거쳐 현대 영어 leisure로 발전했다. 원뜻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이다. 즉,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며 이는 곧 '여유'다.
'레저'는 내게 늘 땀 흘리는 스포츠였고, 계획표에 끼워 넣는 활동이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레저는 정반대였다. 바쁜 삶 속에서 하늘 한 번 못 올려다보는 인간의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었다. 시는 물끄러미 나무를 바라보는 여유, 다람쥐가 뛰노는 걸 그냥 바라보는 시간을 이야기했다.
왜 우리는 레저를 여유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아마도 한가함은 게으름이 되고, 느림은 뒤처짐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서일 것이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몸을 몰아세웠고 그 속도를 효율이라 믿었다. 여유는 시간이 남을 때 주어지는 보너스처럼 여겨졌다.
어르신의 목소리 속에 담긴 느린 숨결을 따라가며 나도 잠시 멈췄다. 여유는 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암송이 끝난 후에도 교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들 나 같은 마음이었다고 믿는다.
그 시를 언제부터 외우셨냐고 여쭤봤다. 지난해 겨울, 복지관 송년 발표회 때 무대에서 낭송하셨다고 했다. 밤마다 중얼거리다 잠을 설친 날도 많았단다. 피곤해하는 모습을 본 남편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말도 했지만 어르신은 끝까지 외웠다고 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지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막힘 없다고요?"
내 말에 어르신은 "그 고생으로 외운 거 아까우니까 틈날 때마다 복습하지"라고 답하셨다. 시는 어느새 어르신의 하루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허락한 '나의 시간'

▲ 누군가의 허락이 아닌 자신의 허락으로 만드는 시간, 그게 진짜 레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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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순서를 정해주고, 어르신은 그 안에서 쉼 없이 살아냈다. 그 바쁜 삶 끝에 찾아온 시 한 줄이 지금 어르신을 붙잡고 있었다. 평생 누군가를 위해 움직였던 손이 지금은 자기만의 언어를 다듬고 있었다. 늦게 찾아온 여유는 작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 단단해 보였다.
어르신은 시를 통해 여유라는 단어를 자기 손으로 어루만지고 계셨다. 그것은 누가 허락해 준 시간이 아니라 자기 삶에 스스로 내린 허락이었다. 당장 눈앞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르신은 조용히 자기 삶의 틈을 넓혀가고 계셨다.
나는 그 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닮고 싶어졌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꾸준히 읊조리는 마음, 누군가의 허락이 아닌 자신의 허락으로 만든 시간, 그것이야말로 진짜 레저 아닐까. 어르신은 그 시를 외운 것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을 품에 안고 계셨다.
나도 내 하루에 그런 문장 하나 쯤은 들여놓고 싶어졌다. 효율 따위 생각 안하고, 삶을 더딘 박자로 걷기 위한 연습을 이제라도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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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생 왕언니'의 영시 낭독, 모두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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