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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생 왕언니'의 영시 낭독,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의 시를 듣고 '레저'의 숨은 뜻, '여유'를 생각하다

등록 2025.07.03 07:00수정 2025.07.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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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어요.[기자말]
어르신의 수첩 영시와 한글 번역이 적혀 있었다
▲어르신의 수첩 영시와 한글 번역이 적혀 있었다 최은영
우리반 최고 언니는 1941년생, 여든네 살 어르신이다. 다들 왕언니로 모신다. 결석이나 지각 한 번 없이 매주 글을 써 오시기에, 나이를 떠나 태도 자체로도 그저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날 어르신은 영시 외우는 이야기에 대한 글을 써 오셨다.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한지 낭독이 끝나자마자 한 목소리로 그 시를 들려달라 그랬다.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W.H.Davies)의 'Leisure'라는 시였다. 수첩에 적은 영시를 내게 건네주신 어르신은 바로 낭송을 시작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는 어르신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레저의 숨은 뜻을 배우다

나는 암송하는 시가 없다. 학교 다닐 때 숙제로 박목월 시를 외웠던 거 같은데 기억나진 않는다. 그런데 영시라니... 너무 먼 이야기다. 살림과 육아와 일에 치이는 내게 영시 암송은 고슴도치에게 빗질 해주는 일 같았다. 백 번 빗질해 봐야 고슴도치 털이 부드러워질까. 그러니 하나마나한 일이다.

세상의 소음은 언제나 효율을 속삭인다.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날, 그분의 막힘없는 암송은 이상하게 오래 남으면서 묘하게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왜 모든 일을 쓸모로 재단했을까.

시의 제목을 새롭게 해석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Leisure(레저)라는 단어는 흔히 스포츠와 연결되지만 어르신 수첩에는 '여유'라고 쓰여 있었다. 영어 단어 Leisure는 라틴어 licēre(허용하다)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대 프랑스어 leisire를 거쳐 현대 영어 leisure로 발전했다. 원뜻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이다. 즉,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며 이는 곧 '여유'다.

'레저'는 내게 늘 땀 흘리는 스포츠였고, 계획표에 끼워 넣는 활동이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레저는 정반대였다. 바쁜 삶 속에서 하늘 한 번 못 올려다보는 인간의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었다. 시는 물끄러미 나무를 바라보는 여유, 다람쥐가 뛰노는 걸 그냥 바라보는 시간을 이야기했다.


왜 우리는 레저를 여유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아마도 한가함은 게으름이 되고, 느림은 뒤처짐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서일 것이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몸을 몰아세웠고 그 속도를 효율이라 믿었다. 여유는 시간이 남을 때 주어지는 보너스처럼 여겨졌다.

어르신의 목소리 속에 담긴 느린 숨결을 따라가며 나도 잠시 멈췄다. 여유는 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암송이 끝난 후에도 교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들 나 같은 마음이었다고 믿는다.


그 시를 언제부터 외우셨냐고 여쭤봤다. 지난해 겨울, 복지관 송년 발표회 때 무대에서 낭송하셨다고 했다. 밤마다 중얼거리다 잠을 설친 날도 많았단다. 피곤해하는 모습을 본 남편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말도 했지만 어르신은 끝까지 외웠다고 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지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막힘 없다고요?"

내 말에 어르신은 "그 고생으로 외운 거 아까우니까 틈날 때마다 복습하지"라고 답하셨다. 시는 어느새 어르신의 하루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허락한 '나의 시간'

 누군가의 허락이 아닌 자신의 허락으로 만드는 시간, 그게 진짜 레저 아닐까.
누군가의 허락이 아닌 자신의 허락으로 만드는 시간, 그게 진짜 레저 아닐까. centelm on Unsplash
세상은 순서를 정해주고, 어르신은 그 안에서 쉼 없이 살아냈다. 그 바쁜 삶 끝에 찾아온 시 한 줄이 지금 어르신을 붙잡고 있었다. 평생 누군가를 위해 움직였던 손이 지금은 자기만의 언어를 다듬고 있었다. 늦게 찾아온 여유는 작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 단단해 보였다.

어르신은 시를 통해 여유라는 단어를 자기 손으로 어루만지고 계셨다. 그것은 누가 허락해 준 시간이 아니라 자기 삶에 스스로 내린 허락이었다. 당장 눈앞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어르신은 조용히 자기 삶의 틈을 넓혀가고 계셨다.

나는 그 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닮고 싶어졌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꾸준히 읊조리는 마음, 누군가의 허락이 아닌 자신의 허락으로 만든 시간, 그것이야말로 진짜 레저 아닐까. 어르신은 그 시를 외운 것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을 품에 안고 계셨다.

나도 내 하루에 그런 문장 하나 쯤은 들여놓고 싶어졌다. 효율 따위 생각 안하고, 삶을 더딘 박자로 걷기 위한 연습을 이제라도 시작해보려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복지관글쓰기 #시니어글쓰기 #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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