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을 꿈꾸는 극중 애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한장면.
넷플릭스
아내는 드라마나 영화 스토리에 쉽게 감정이입 되거나 공감하는 캐릭터다. 다행히 단순한 동정심이거나 일방적인 측은지심은 아닌 걸로 보인다. 이런 성향 때문에 눈물콧물이 강과 바다를 이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짠한 화면 안팎 풍경이 애잔하기까지 했다. 타칭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 한 마디를 보탰다.
"아니, 공감도 적당히 해야지. 과잉 공감은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라 정신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는데. 너무 그러면 안 좋지 않을까?"
"냉혈인간님, 모르면 말을 마세요. 그래도 울다보면 마음도 시원해지고 후련해지고 좋은 것도 많은데..."
맞다. 공감능력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사회성 덕목이다. 타인과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한 전제로서 꼭 필요한 능력이다. 공감은 대인관계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공감하는 당사자에게 정서적으로 이로운 것도 많다. 그토록 염원하던 카타르시스를 준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불안이나 우울, 긴장과 슬픔 등이 풀리며 해소된다. 이때 보이는 눈물은 이러한 정화작용의 상징물이다.
공감능력은 내가 상대방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추측과 이해를 기초로 한다. 공감은 상대방과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며 상대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누군가에게 '공감능력이 없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최고의 비난이자 욕이 될 수도 있겠다.
공감능력이 나올 때 함께 딸려 나오는 단어가 있다. 감정이입. 감정이입은 내가 상대의 상황이라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는 유사한 경험이나 상황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유사한 경험이 없으면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
공감능력과 감정이입은 유사 경험 존재 여부에 차이가 있으며 이해의 방향이 서로 다르다. 즉, 공감능력은 상대방에게서 나에게로 건너오는 것이고, 감정이입은 내가 상대방에게 건너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양자는 서로 혼용되고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명확한 구별이 별 의미 없을 때도 많다. 불행하게도 우리사회에는 양자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공감과 감정이입 양자를 '약자들의 감성'이라고 오해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일 수도 있겠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아내에게 성급하게 눈을 흘긴 것은 공감능력을 탓하는 게 아니라 과잉 공감을 우려하는 거였다. 어떤 스토리나 타인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고 공감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이지만, 그게 지나치면 감정이 소진되거나 심리적 허기를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공감 총량의 법칙'을 전제한다면 더 중요한 대상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이다.
모름지기 공감능력은 이심전심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상호 공감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공감은 개인의 영역에 머무를 때가 많지만, 이심전심은 소통이라는 사회적인 옷을 입을 때가 많다. 어쨌든 양자 모두 사회적 관계를 위한 선한 능력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공감(능력)이 가진 긍정적 측면에 대하여 일부 부정적 의견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심리학자 폴 블룸은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에서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지침이며, 우리는 공감이 없을 때 더 공평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독일의 인지과학자인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공감의 두 얼굴>이라는 책에서 "공감은 자아상실로 이어질 수 있으며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물론 세계적인 전문가들의 주장에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속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의 말하는 공감능력에 대한 비판은 공감능력의 한계와 편향성, 과잉 공감의 위험성을 말하지 않았을까.
(과잉)공감이 개인의 정서적 측면에 머무를 때는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표현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작용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회적 문제가 된다. 신념집단이나 정치현상에 과잉 공감이 투사되면 이는 '선택적 과잉 공감'으로 이어지고, 여지없이 편 가르기와 '우리가 남이가!'라는 듣기 민망한 집단주의로 향하고야 만다. 생각해보면, 모든 과잉 공감이 욕먹을 일은 아니다.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를 내는 선택적 과잉공감이 문제다.
개인의 문제는 사회적 문제에 맞닿아 있고 사회적 비극은 다시 개인의 비극을 낳는다. 개인들의 선택적 과잉 공감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비극은 다시 우리 현대사의 여러 불행과 맞닿아 있다. 선택적 과잉 공감이 이념(신념)과 종교(정치)의 옷을 입을 때 벌어졌던 불행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거의 모든 사건과 그 단면에 켜켜이 박혀있다.
2024년 12월 느닷없는 계엄과 내란, 드라마틱한 탄핵심판과 신정부의 탄생이라는 정치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불행한 역사를 경험할 뻔 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영화 <서울의 봄>에서와는 달리 더 성숙한 사회시스템과 훨씬 더 용감한 시민들이 있었다. 그 사회시스템과 더 용감한 시민들은 질곡진 과거사의 경험에 대한 과잉 공감에서 오지 않았을까.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영화 같은 현실에 분노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는 우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 진정한 과잉 공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두 얼굴이 존재하는 과잉 공감능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영화 속 실화처럼 또다시 반복되었을 계엄과 내란의 시간이 종지부를 찍어가고 있다. 시절과 사람이 확 바뀐 2025년 7월, 문득 그게 궁금해진다. 사계절의 매주 토요일을 시청역 앞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과 함께 했던 수많은 시민들의 한숨과 눈물은 감정이입이었을까 아니면 공감이었을까. 공간이 사람의 의식을 지배할 수도 있겠지만, 더 분명한 것은 시절의 명암이 사람들의 일상과 표정을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아내나 중년의 타인들이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하릴없이 눈물을 흘린 까닭은 과잉 공감 말고도 갱년기 증상이나 호르몬 변화, 개인의 삶과 일상의 괴로움, 가족과의 갈등이나 저마다 추억의 소환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섣부르게 뜨거운 눈물 바람을 (과잉)공감의 탓으로 돌렸던 것은 그 타인들의 삶과 눈물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공감능력 부족 때문이지 않았을까. 성급한 속단과 예의 없음을 반성한다. 하여, 더 많이 공감하며 요망지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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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구별을 여행하는 행복 탐험가. 부모의 삶과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고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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