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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사적으로 지정돼 있는 성당

학살에 맞선 저항운동 구심점 남동성당과 지역방위대 거점 배고픈다리

등록 2025.07.14 09:35수정 2025.07.1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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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동성당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면서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광주 남동성당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면서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이돈삼

광주 남동성당은 5·18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전남도청과도 가까워 5·18의 한가운데에 섰다. 민주인사와 성직자들이 성당에서 수시로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성직자와 민주인사들이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하고, 대책위는 일곱 가지 요구사항을 갖고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했다. 허사였다.

5월 26일 김성용(프란치스코) 주임신부가 광주를 빠져나간다. 김 신부는 농성광장까지 '죽음의 행진' 뒤, 대책위와 종교계 요청을 받아들여 서울로 향했다.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고, 수습 방안도 찾기 위해서였다.


김성용 신부는 아홉 차례 검문을 뚫고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청이 공수부대의 군홧발에 짓밟힌 뒤였다. 김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은 계엄사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남동성당 안내판에 그려져 있는 그림. 남동성당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서 불의한 권력에 맞섰다.
남동성당 안내판에 그려져 있는 그림. 남동성당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서 불의한 권력에 맞섰다. 이돈삼

 남동성당에서 열린 5.18 1주기 추모 미사 모습. 남동성당은 해마다 5월 영령 추도 미사를 올리며 희생자 넋을 기렸다.
남동성당에서 열린 5.18 1주기 추모 미사 모습. 남동성당은 해마다 5월 영령 추도 미사를 올리며 희생자 넋을 기렸다. 남동성당

남동성당의 진가는 5·18 이후 더욱 빛났다. 희생자 추모 미사를 지내고,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진실 알리기에 앞장섰다. 6월엔 광주학살 규탄 성명을 내고, 가톨릭조직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렸다. 희생자와 구속자를 위한 월요 미사, 5월 영령 추도 미사를 올리며 희생자 넋을 기리며 항쟁 의미를 되새겼다.

82년 10월 옥중 단식 끝에 숨진 박관현 열사 빈소도 성당에 차렸다. 박관현은 80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끌었다. 시민 항쟁과 계엄군 만행을 담은 이른바 '광주 비디오'를 상영하고, 각종 사진집과 자료집을 내며 5·18 진실을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87년 6월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결성식도 남동성당에서 열렸다.

남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섰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면서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시민들은 '5·18 기념성당' 별칭을 붙여줬다. 남동성당이 5·18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남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시민들로부터 ‘5·18 기념성당’ 별칭을 얻었다. 5·18 사적지 표지석이 성당 앞에 세워져 있다.
남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시민들로부터 ‘5·18 기념성당’ 별칭을 얻었다. 5·18 사적지 표지석이 성당 앞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조선대학교 본관 전경. 조선대는 주민 7만2000여 명이 힘을 합쳐 설립한 대한민국 첫 민립대학이다.
조선대학교 본관 전경. 조선대는 주민 7만2000여 명이 힘을 합쳐 설립한 대한민국 첫 민립대학이다. 이돈삼

남동성당에서 가까운 조선대학교는 대한민국 첫 민립대학이다. 1946년 7만2000여 명이 학교 설립에 함께했다. 5·18 기간 조선대엔 계엄군이 머물렀다. 21일 늦은 오후 계엄군이 도심에서 물러날 때까지 조선대는 7공수와 11공수 작전본부로 쓰였다.


5월 18일 새벽, 7공수여단 제35대대가 학교에 들이닥쳤다. '계엄군'으로 포장한 공수부대는 학교를 뒤지고, 학생회 간부를 붙잡았다.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폭행하고, 학교 운동장에 설치한 막사와 체육관에 가뒀다.

공수부대는 전쟁터에서 붙잡은 포로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7공수는 18일 오후 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들에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18일 밤엔 11공수여단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19일 오후 시민 1500여 명이 조선대 정문 앞에서 시위했다. 부당하게 잡혀간 시민의 석방을 요구했다. 20일에는 시민을 구하러 온 시위대가 계엄군과 밤샘 대치했다.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해 계엄군의 저지선 돌파도 시도했다. 운동장에선 강경 진압에 소극적인 부대원에 대한 구타와 얼차려가 가해졌다.

조선대에 머물던 공수부대가 21일 오후 퇴각했다. 공수부대는 주남마을 인근 야산에 머물며 화순 방면 길목 통제에 나섰다. 22일엔 코브라 헬기가 조선대 뒷산 비탈을 향해 위협사격을 했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도청 침탈이 자행되면서 조선대는 다시 계엄군 주둔지가 됐다. 전남대병원과 기독병원, 적십자병원과 달리 조선대병원에서의 부상자 치료가 어려웠던 이유다.

 조선대학교 정문에 세워져 있는 5.18사적지 표지석. 조선대 정문 일대는 5.18당시 시민들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20일에는 시민을 구하러 온 시위대가 계엄군과 밤샘 대치하기도 했다.
조선대학교 정문에 세워져 있는 5.18사적지 표지석. 조선대 정문 일대는 5.18당시 시민들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20일에는 시민을 구하러 온 시위대가 계엄군과 밤샘 대치하기도 했다. 이돈삼

 조선대학교 공대 앞에 세워져 있는 김동수 열사 추모비. 김동수 열사는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았다.
조선대학교 공대 앞에 세워져 있는 김동수 열사 추모비. 김동수 열사는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았다. 이돈삼

학교는 공수부대 주둔지가 됐지만, 학생들은 시민군에 참여해 큰 역할을 했다.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 총격을 받은 김동수 열사가 조선대학생, 박성용 열사는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시신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묘역에 묻혔다. 김동수 추모비가 공대 앞 민주공원에, 박성용 추모탑은 조대부고에 세워져 있다.

조선대학교는 5·18 이후 전남대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됐다. 학원 자율화와 함께 군부정권에 맞선 정치투쟁에도 앞장섰다. 5월 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도 가열차게 전개했다. 89년 변사체로 발견된 이철규는 군사정권 때 억울하게 희생된 의문사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5.18민주묘지에 있는 박성용 열사 묘. 박성용 열사는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았다.
5.18민주묘지에 있는 박성용 열사 묘. 박성용 열사는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았다. 이돈삼

 조선대학교 민주공원. 조선대의 민주화운동 역사와 함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대학교 민주공원. 조선대의 민주화운동 역사와 함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돈삼

학동 배고픈다리(홍림교) 일대는 시민군의 지역방위 활동 무대였다.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가 조선대 뒷산으로 물러갔다. 지역방위대는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내려올 것에 대비해 편성됐다.

지역주민에게 계엄군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다. 학살자였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뭉쳤다. 예비군과 젊은이로 이뤄진 지역방위대는 이 다리를 중심으로 방어막을 구축했다. 방위대는 조당 12명씩, 모두 12개 조가 꾸려졌다.

지역방위대는 23일 자정 무렵 숙실마을에서 내려오는 계엄군을 물리쳤다. 30여 분의 총격전 결과였다. 그날 낮엔 사복 차림의 공수부대원을 붙잡아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인계했다. 인근 용산마을에서 학살당한 시민 주검을 상무관으로 옮기기도 했다. 주민들은 밥과 음료 등을 가져다주며 지역방위대를 응원했다.

시민수습대책위가 질서 유지를 이유로 무기 회수 방침을 밝혔다. 지역방위대는 무기를 반납했다. 무기 회수에 반발한 일부 대원은 활동을 계속하며 수습대책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배고픈다리로 흐르는 홍림천 풍경. 이 일대는 80년 5월 시민군의 지역방위 활동 무대였다.
배고픈다리로 흐르는 홍림천 풍경. 이 일대는 80년 5월 시민군의 지역방위 활동 무대였다. 이돈삼

 광주 태봉마을 풍경. 오래전 그려진 담장벽화가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광주 태봉마을 풍경. 오래전 그려진 담장벽화가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이돈삼

지역방위대는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목인 배고픈다리 일대를 비롯 나주 방면 대성초등학교 앞과 백운광장, 송정리 방면 농성광장, 장성 방면 운암동, 담양 방면 서방시장, 무등산 방면 산수동 등에서도 활동했다.

5월 27일 새벽,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해 도청이 무너졌다. 계엄군은 지역방위대로 활동한 시민 검거에도 나섰다. 붙잡힌 이들은 개처럼 끌려가 갖은 폭력과 고문을 당하고,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평화로운 마을이 흉흉해졌다. 지역방위대로 활동했던 일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다. 급기야 광주제2순환도로가 마을을 가로질러 두 동강 냈다. 숙실마을은 개발되고, 태봉마을은 쇠락해졌다. 오래전 설치된 빛바랜 마을 안내판이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태봉마을 풍경. 오래전 설치된 빛바랜 마을 안내판이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태봉마을 풍경. 오래전 설치된 빛바랜 마을 안내판이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이돈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매일에도 실립니다.
#광주남동성당 #조선대학교 #배고픈다리 #518사적지 #조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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