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대학교 본관 전경. 조선대는 주민 7만2000여 명이 힘을 합쳐 설립한 대한민국 첫 민립대학이다.
이돈삼
남동성당에서 가까운 조선대학교는 대한민국 첫 민립대학이다. 1946년 7만2000여 명이 학교 설립에 함께했다. 5·18 기간 조선대엔 계엄군이 머물렀다. 21일 늦은 오후 계엄군이 도심에서 물러날 때까지 조선대는 7공수와 11공수 작전본부로 쓰였다.
5월 18일 새벽, 7공수여단 제35대대가 학교에 들이닥쳤다. '계엄군'으로 포장한 공수부대는 학교를 뒤지고, 학생회 간부를 붙잡았다.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폭행하고, 학교 운동장에 설치한 막사와 체육관에 가뒀다.
공수부대는 전쟁터에서 붙잡은 포로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7공수는 18일 오후 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들에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18일 밤엔 11공수여단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19일 오후 시민 1500여 명이 조선대 정문 앞에서 시위했다. 부당하게 잡혀간 시민의 석방을 요구했다. 20일에는 시민을 구하러 온 시위대가 계엄군과 밤샘 대치했다.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해 계엄군의 저지선 돌파도 시도했다. 운동장에선 강경 진압에 소극적인 부대원에 대한 구타와 얼차려가 가해졌다.
조선대에 머물던 공수부대가 21일 오후 퇴각했다. 공수부대는 주남마을 인근 야산에 머물며 화순 방면 길목 통제에 나섰다. 22일엔 코브라 헬기가 조선대 뒷산 비탈을 향해 위협사격을 했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도청 침탈이 자행되면서 조선대는 다시 계엄군 주둔지가 됐다. 전남대병원과 기독병원, 적십자병원과 달리 조선대병원에서의 부상자 치료가 어려웠던 이유다.

▲ 조선대학교 정문에 세워져 있는 5.18사적지 표지석. 조선대 정문 일대는 5.18당시 시민들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20일에는 시민을 구하러 온 시위대가 계엄군과 밤샘 대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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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대학교 공대 앞에 세워져 있는 김동수 열사 추모비. 김동수 열사는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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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공수부대 주둔지가 됐지만, 학생들은 시민군에 참여해 큰 역할을 했다.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 총격을 받은 김동수 열사가 조선대학생, 박성용 열사는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시신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묘역에 묻혔다. 김동수 추모비가 공대 앞 민주공원에, 박성용 추모탑은 조대부고에 세워져 있다.
조선대학교는 5·18 이후 전남대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됐다. 학원 자율화와 함께 군부정권에 맞선 정치투쟁에도 앞장섰다. 5월 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도 가열차게 전개했다. 89년 변사체로 발견된 이철규는 군사정권 때 억울하게 희생된 의문사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 5.18민주묘지에 있는 박성용 열사 묘. 박성용 열사는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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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대학교 민주공원. 조선대의 민주화운동 역사와 함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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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 배고픈다리(홍림교) 일대는 시민군의 지역방위 활동 무대였다.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가 조선대 뒷산으로 물러갔다. 지역방위대는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내려올 것에 대비해 편성됐다.
지역주민에게 계엄군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다. 학살자였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뭉쳤다. 예비군과 젊은이로 이뤄진 지역방위대는 이 다리를 중심으로 방어막을 구축했다. 방위대는 조당 12명씩, 모두 12개 조가 꾸려졌다.
지역방위대는 23일 자정 무렵 숙실마을에서 내려오는 계엄군을 물리쳤다. 30여 분의 총격전 결과였다. 그날 낮엔 사복 차림의 공수부대원을 붙잡아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인계했다. 인근 용산마을에서 학살당한 시민 주검을 상무관으로 옮기기도 했다. 주민들은 밥과 음료 등을 가져다주며 지역방위대를 응원했다.
시민수습대책위가 질서 유지를 이유로 무기 회수 방침을 밝혔다. 지역방위대는 무기를 반납했다. 무기 회수에 반발한 일부 대원은 활동을 계속하며 수습대책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 배고픈다리로 흐르는 홍림천 풍경. 이 일대는 80년 5월 시민군의 지역방위 활동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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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태봉마을 풍경. 오래전 그려진 담장벽화가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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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방위대는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목인 배고픈다리 일대를 비롯 나주 방면 대성초등학교 앞과 백운광장, 송정리 방면 농성광장, 장성 방면 운암동, 담양 방면 서방시장, 무등산 방면 산수동 등에서도 활동했다.
5월 27일 새벽,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해 도청이 무너졌다. 계엄군은 지역방위대로 활동한 시민 검거에도 나섰다. 붙잡힌 이들은 개처럼 끌려가 갖은 폭력과 고문을 당하고,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평화로운 마을이 흉흉해졌다. 지역방위대로 활동했던 일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다. 급기야 광주제2순환도로가 마을을 가로질러 두 동강 냈다. 숙실마을은 개발되고, 태봉마을은 쇠락해졌다. 오래전 설치된 빛바랜 마을 안내판이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 태봉마을 풍경. 오래전 설치된 빛바랜 마을 안내판이 45년 전 그날을 떠올려 준다.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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