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원 중인 안학섭 선생(2025-07-19)
지창영
역사 발전과 사회 변화에 관한 이야기 중에 화제는 어느덧 전쟁 얘기로 넘어갔다. 변화에 순응하지 않는 경우 때로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런데 그 전쟁이란 것도 말이죠, 어떤 이들에게는 기회가 되더라고요. 2차대전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도 지켜봤고 조국전쟁(한국전쟁을 이렇게 표현함)도 겪어 봤지만, 그 난리통에도 기득권자는 돈 벌어요. 일부 정치인과 군인들 말이에요."
같은 맥락에서 국가 지도자와 전쟁 얘기도 오갔다. 최근 윤석열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일을 불사했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경우 전쟁 중에도 재산이 늘었다고 한다.
대화는 안 선생의 삶으로 모아졌다.
"난 태어나서부터 식민지에서 자랐어요. 그때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였죠. 지금은 미제 식민지에요. 내 나이가 아흔여섯인데 100년 가까이 되도록 식민지에서 살고 있는 거죠. 갖은 구박을 받았어요. 그중 43년을 감옥에서 보냈고요."
2000년 9월에 남북의 합의에 따라 비전향장기수 63명이 송환됐다. 안 선생은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송환에 응하지 않고 남녘에 남기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나라가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미군이 남쪽을 점령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땅을 떠날 수는 없었죠. 미군이 나갈 때까지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주를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싸우는 동지들한테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죠."
그렇게 하여 남녘에 남은 안 선생은 주로 통일운동 행사와 집회에 참여하고 발언을 하는가 하면 자신을 찾아오는 운동가들에게 체험을 바탕으로 한 말씀을 들려주고 격려도 해 왔다.
2018년 한반도의 봄을 맞아 남북의 수뇌가 만나고 북-미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때 희망을 품기도 했으나 미국이 끝내 돌변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제국주의가 스스로 물러가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기도 했다. 이재명 정부에 대해서도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있고 응원도 하지만 대통령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고 한다.
"이 땅에 미군이 있고 미국이 내정에 간섭하는 조건에서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안 돼요. 대통령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미국이 틀면 안 되는 구조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시절에 지켜봤잖아요. 결국 미군이 나가고 미국이 간섭하지 않아야 남북 관계든 통일 문제든 해결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미국이 스스로 나갈 리가 없죠. 그래서 미군 철수 목소리가 높아져야 해요. 이런 자주적인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 지난날 탄핵 집회만큼 된다면 미국도 오만하게 버티기만 하지는 못하겠죠. 더구나 요즘 미국이 점점 쇠락해 가고 있잖아요. 우리 내부의 목소리와 국제 정세의 변화가 맞물릴 때 자주의 새날이 올 수 있는 거죠."
응급실에 입원하기 전까지 가장 애정을 쏟은 활동은 매주 토요일에 미국대사관 인근에서 열리는 자주통일 시국기도회였다. 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해체를 비롯한 자주의 목소리를 꾸준히 외쳐 온 집회다. 1137차 집회가 열린 지난 12일에도 참석했다.
"시국기도회에도 매번 나오고 싶었지요. 예전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요즘은 한 달에 한두 번 참석도 쉽지 않아요. 예전과 달리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자꾸 주저앉게 되고 넘어지기도 해서 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참 미안하죠."

▲ 7월 12일 열린 1137차 미대사관 시국 기도회에 참석한 안학섭 선생(오른쪽 5번째)
지창영
병환 중인 점을 생각하여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하기로 생각하고 현재의 심경에 관해 질문했다.
"살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싶어요. 이제 죽을 때가 됐죠. 죽는 건 필연이지만 식민지 땅에 묻히고 싶지는 않아요. 이십오 년 전에는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여 북으로 가지 않고 남았지만 이제 더 이상 뭘 할 수도 없는 처지에 이르렀으니 할 수만 있다면 조선으로 가서 뼈를 묻고 싶은 생각이에요. 자주와 통일을 위해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있는 땅에서 말이죠."
모진 고문과 사상 전향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43년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지켜 온 안학섭 선생, 그가 그리운 조국 땅을 지척에 두고도 남녘에 남아 이루고자 했던 것은 바로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이다.
그는 폐부종으로 육신이 급격히 쇠약해져 언제 다시 응급실로 이송될지 모르는 처지다. 그가 살아서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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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학박사, 번역가.
충남 청양 출생.
시집 <<송전탑>>(2010).
번역서 <<명상으로 얻는 깨달음>>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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