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저지르는 언행불일치 어른의 언행불일치, 이를 어른보다 빨리 눈치채는 어린이들
김대홍
이 말을 하는 순간 힘이 '스르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 아이가 본심을 읽은 게 아닐까. 내가 화가 난 이유는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말을 듣지 않아서가 아닐까. 어쩌면 그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은 대체로 위선의 껍질을 두른다. 안 그런 척, 잘하는 척, 좋은 척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놀랍게도 위선 아래 감춰진 본질을 참 잘 찾아낸다. 그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 '흠칫' 놀라게 되고, 부인하기 위해 더 화를 낸다.
아침 등원길. 딸이 "아빠" 부르더니 중얼거린다.
"나는 혼자서 살 거야. 그리고 애를 낳을 거야. 혼자서 애를 기를 거야."
여성의 독립심. 그런 차원이 아니다. 딸은 최근 들어 부쩍 이와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다. 얼마전엔 저녁 식사 시간 때 비슷한 말을 했다.
"아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나는 혼자 살 거야."
딸은 좋아하는 남자애가 둘이다. 그 둘의 이름을 잘 알고 얼굴도 안다. 처음엔 딸이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다"고 말해서 궁금했다. 이름을 물었고, 이후 그 남자애들을 볼 일이 없을까 기회를 노렸다. 의외로 동선이 겹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각종 학원과 가정사로 제각기 바빴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드디어 얼마 전 한 애를 만날 일이 생겼다. 딸이 학원차로 하원할 무렵 딸이 좋아하는 두 남자아이 중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딸은 반가운 마음에 그 아이 이름을 몇 번을 불렀다. 남자아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내 마음이 아팠다.
딸은 두 달 전엔 "나는 잘하는 게 없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말이었다. A4 용지를 꺼내서 딸이 잘하는 것을 하나씩 써내려갔다. 15개쯤 썼다. 그날부터 당장 딸이 보일 때마다 그 종이를 보여줬다. 딸은 내용은 들어보지도 않고, 아빠가 딸이 잘하는 것을 적은 종이만 보고서도 웃었다. "나는 잘하는 게 없어"라는 말이 그 즈음 사라졌고, 이제 그 종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잘하는 게 없어"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말이 나타났다. 대신 "나를 좋아하는 애가 없어"라는 말이 나타났다. 나도 코멘트가 바뀌었다.
"너를 좋아하는 애들이 나중에 엄청 생길 거야. 안 생길 리가 없어. 그럼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애가 생길 거야. 그럼 이렇게 팔짱 끼고 고르는 거야. 누굴 고르지라고."
딸은 싱긋 웃었다. 어제 딸 목욕을 시키다가 먼저 말을 걸었다.
"딸아, 너는 나중에 누구랑 사귈 거야. 1번 잘생긴 사람, 2번 재미있는 사람, 3번 요리 잘해주는 사람, 4번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딸은 1초만에 대답했다.
"1번하고 5번."
"5번은 뭔데?"
"응, 5번은 멋진 거야. ○○○(두 명 중 한 명)이 멋져."
"○○○의 어떤 점이 멋진데?"
"다 멋져. 그냥 다. 웃어도 멋지고."
아이쿠야. 자식들이 어떻게 컸으면 좋겠는지 설문에 응할 때가 있다. 그럼 항상 '기죽지 않고 컸으면 좋겠어요'라고 써넣는다. 돌이켜보면 '언행불일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아빠는 딸의 기를 죽이는 말을 종종 한다. 규칙을 어길 때, 약속을 어길 때, 거짓말을 할 때 좀 가혹하다 싶게 혼을 낸다.
'자식도 자라지만, 어른도 자라야 한다.' 맞는 말이다. 어느 순간, "나는 잘하는 게 없어요" "나를 좋아하는 애가 없어요"와 다른 코멘트를 딸이 하게 되면 내 '언행불일치'가 조금은 나아졌구나 싶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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