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면사무소 1930년대 청주면사무소. 해방 후 이 곳 2층에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청주시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8월 말 기준 전국에 145개 지부가 결성되었다. 대부분은 독립투사들과 지역 사회 유력자들이 위원장 및 주요 임원을 맡았다. 그런데 청주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청주에선 독립운동 경력은 고사하고 친일행위자들이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감투를 썼다. 이는 일제강점기 청주에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농민운동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에 기반한 민족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의 역사가 취약했기에 반민족행위자(친일협력자)가 건국 도상의 전면에 나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WELCOME US ARMY
일제로부터의 조선독립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조선 민중들의 처절한 독립 투쟁에도 일제의 결정적 패망은 '강대국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정이, 이북은 소군정이 점령했다. 9월 8일,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10월 1일 미군 선견분대가 청주에 진주했다. 제35 군정 중대는 11월 1일 청주에 도착했다(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지역 우익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재인용).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던 미 보병 제7사단 27연대 병력이 인천 상륙 후 철도 수송편으로 청주역에 도착한 것이다. 청주에 주둔한 제35 군정 중대는 장교 12명, 사병 46명이었다.
그날 청주시민 다수와 7개 중학교 학생들은 'WELCOME U.S. ARMY'라는 붓글씨 플래카드와 태극 깃발을 들고 청주역(현 청주도시재생허브센터, 필자 주)에서 도청에 이르는 본정통 도로 양측에 도열하여 제법 규모 있는 환영행사를 열었다(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껌을 씹는 병사와 간간이 카빈총을 거꾸로 어깨에 둘러멘 채 히죽히죽 웃으며 보조도 맞지 않게 행군을 하는 미군을 맞이한 것은 정교원 충북도지사였다. 정교원 지사와 도청 직원들은 맥주·포도주·정종 등 주류와 기타 기호품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성대한 환영을 받은 미군은 일본 학생들이 다니던 제2중학교(현 청주공고)와 병사구사령부(현 충북진로교육원 근처), 대마공장(현 청원경찰서)에 막사를 설치하고 주둔했다. 미 군정요원 등 고급 장교들은 탑동 양관 건물에 입주했다.
미군정,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다
미군정이 최초로 한 정치 활동은 '인민위원회의 불법화 조치'였다. 건국준비위회는 미군정 진주를 앞두고 인민위원회로 전환해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민중 본위의 민주개혁을 주창한 좌파를 정치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던 정치 세력을 부정하고,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를 이식하기 위한 사전적 조치였다.
충북인민위원회는 도내 10개 군 중 충주, 제천, 단양, 청주·청원, 보은, 옥천, 영동 등 7개 군에 있었다. 이 중 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수행한 지역은 제천, 옥천, 영동으로 3개 지역에 불과했다. 그만큼 청주의 인민위원회 세력은 취약했다.
청주의 인민위원회 세력이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은 사무실 위치에서도 엿볼 수 있다.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이 청주읍사무소 2층인데 반해 인민위원회 사무실은 청주관이라는 여관이었다. 인민위원회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배제는 고문(회) 조직구성에서도 나타났다. 17명의 도군정 고문 중 5명은 도군정 장관이 임명하였고 11명은 10개 군에서 선출하였다. 그 중에서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였던 인물은 2명뿐이었다.
고문회가 충북 도군정의 주요 관리 임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도군정의 간부급 인사 및 경찰 책임자에는 대부분 지역 유지 또는 월남한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도군정은 사람들이 정보에 무지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선전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군정의 정책과 역할 및 국내외 정세 등을 도내 전역에 알리기 위해 리플릿, 포스터, 주간 다이제스트, 주간 농민(미군정 공보국이 발행) 등을 도내 전역에 매주 배포하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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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근세60년사화편찬위원회, <청주근세60년사화>, 1985
민주주의 민족전선 편집, <해방조선 1~2>, 1988
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 1989
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2004
충북학연구소, <해방과 전쟁기 충북자료집 1>, 2005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2010
청주시, <청주시지>, 2017
국사편찬위원회, '강동정치학원 출신 3인의 이야기', 2008
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지역 우익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충북역사문화연대, <지도 들고 청주시현대사 여행>, 2008
충북역사문화연대, '청주시현대사지도', 2008
森田芳夫, <朝鮮終戰의 記錄>,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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