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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폐하께 충성" 외치던 그는 어떻게 청주 건준위 감투를 썼나

[청주 기억여행 1945~1960 ②] 해방 후 청주 정치 상황

등록 2025.08.11 14:30수정 2025.08.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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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기자말]

청주신사 일제강점기 청주신사 모습
▲청주신사 일제강점기 청주신사 모습 황동수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공무원 수십 명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전날 "15일 정오에 중대 방송을 하니 모두 라디오를 청취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들릴락 말락 하는 모기만 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 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그대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중국)·소 4개국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라디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충북도청 일본인 간부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천황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호지(護持)(수호)하고, 그대 신민의 적성(赤誠)(참된 정성)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그대 신민과 함께할 것이다."

쇼와(昭和) 천황의 항복 방송이 끝나자 일본인 간부들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일부는 무릎을 꿇은 채 대성통곡을 했다. 조선인 사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껌벅였다.

사환은 옆에 있던 주임을 따라 군중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나무 그늘로 갔다. 상기된 얼굴을 한 주임이 사환에게 "천황이 항복한 거야!"라고 했다.

잔치집 vs. 초상집


일제로부터 35년간의 식민지 생활은 이로써 끝이 났다. 하지만 청주시민들은 정작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 하루가 더 지나서야 조선이 독립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기 때문이다.

청주군 남이면 석곡리(현 청주시 강서1동)에서는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벌였다. 대다수 조선인에게 독립은 잔치집 분위기를 연출할 만한 일이었지만, 일부는 초상집이 되었다.


8월 16일 청주군 북일주재소 김진백(金鎭伯) 지서 주임이 북일면(현 청주시 내수읍)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순사라 불린 경찰은 민중들의 원성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독립투사들의 환영대회(민중대회)가 중앙공원에서 벌어졌다. 환영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독립투사들의 환영대회(민중대회)가 중앙공원에서 벌어졌다. 환영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네이버 지도 갈무리

다음 날인 8월 17일에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벌어졌다.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독립투사들의 환영대회(민중대회)가 중앙공원에서 벌어진 것이다. 환영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꽹과리를 치는 이들이 선두에 섰고, 시민 수백 명이 뒤를 따랐다. 자가용, 버스, 트럭 등 모든 차량이 동원되었고, 차량을 꽉 메운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해군 식량을 만드는 일진공장을 습격하기도 했다(모리타 요시오, <조선종전의 기록>, 1979).

청수과자점 독립운동가 환영대회 후 청주 시내 행진 때 앞장 선 황기봉(검정 양복을 입은 이)
▲청수과자점 독립운동가 환영대회 후 청주 시내 행진 때 앞장 선 황기봉(검정 양복을 입은 이) 황동수

남주동에서 청수과자점을 경영하던 황기봉이 "조선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뒤를 잇는 시민들이 목이 터져라 복창했다. 황기봉은 평소 씨름대회나 행사 때마다 사회를 도맡아 하던 이였다.

만세 행진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시민이 충북도청에서 우암산 방향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우암산 초입에 있는 신사였다. 신사(神社)는 일본의 신이나 국가에 이바지한 인물을 모시는 곳이다. 일 제국주의는 전국에 신사를 설치하고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이었다.

신사로 몰려간 시민들은 도리이(鳥居, 입구문)에 밧줄을 걸었다.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동시에 시민들의 팔뚝에 푸른 심줄이 툭 불거졌다. 그렇게 근엄하고 우뚝 서 있던 도리이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10년 묵은 체증이 가신 듯했다.

독립운동가 환영대회, 본정통 행진, 신사 파괴로 청주 시내는 한껏 잔치집 형국이었다. 그러나 도청이 있는 문화동과 일본인들이 몰려 살던 영동은 상황이 달랐다. 문화동의 일본인 공무원 관사와 영동의 일본인 주택가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급하게 짐을 싸 자국(일본)으로 도망치듯이 떠난 것이다.

황국신민 서사 선창한 그가, 애국자로?

8월 19일 서울역에서 조치원행 기차에 오른 홍원길은 우연찮게 김동환과 김춘성을 만났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언쟁이 붙었다. 대화 주제는 북일주재소 지서 주임 김진백의 타살 사건이었다.

김춘성이 "같은 민족으로써 김진백을 타살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오"라고 분개했다. 그리고는 "치안 부재"를 운운했다. <동아일보> 지국장을 역임한 홍원길은 "민중의 원성을 산 지서 주임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논쟁은 기차 안의 분위기를 한껏 달구었다.

홍원길은 열불이 터졌다. 같은 민족, 치안 부재, 민족 정신 운운한 상대방은 일제강점기 청주 오정목(五町目, 방아다리)에서 정회장(町會長)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김춘성은 주민들 앞에서 황국신민 서사(우리는 대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 한다 등의 내용)를 선창했었다. 그랬던 그가 해방이 되자 애국자인 척 나서며 독립운동가 환영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홍원길은 씁쓸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사실 김춘성의 경우는 '변신의 귀재' 축에도 끼지 못한다. 해방 직후 홍봉희, 김의연, 안철수 등 15인은 충청북도자치위원회(아래 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마지막 충북도지사였던 정교원을 찾아가 행정권을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정교원 지사는 상부의 명령이나 지침이 없다며 거부했다. 자치위원들은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좌파(좌익)였던 자치위원들에게는 행정권과 치안권을 강제로 인수할 만큼의 물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변신의 귀재

이와 달리 지역의 유력자 및 실업가들은 청주읍사무소 2층(현재의 청주시의회 청사)에 모여 '충청북도치안유지회'(아래 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은 구연직 제일교회 목사가 맡았다. 이들은 남아 있는 경찰들과 협력하여 관내 치안을 유지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친일 경찰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치안유지회는 자치위원회를 흡수·통합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장은 이명구가 맡았다. 그렇다면 치안유지회와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한 구연직과 이명구는 어떤 인물인가?

구연직은 1938년에 청주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한 이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충청노회지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충청북도 발기인, 조선예수교장로회가 개편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충청교구장으로 활동했다. 이명구는 일제강점기 청주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중추원 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2010).

즉, 두 인물은 친일협력자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해방 후 충북지역 건국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여운형·안재홍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는 독립투사들이 만든 건국 조직이었는데 말이다.

청주면사무소 1930년대 청주면사무소. 해방 후 이 곳 2층에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청주면사무소 1930년대 청주면사무소. 해방 후 이 곳 2층에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청주시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8월 말 기준 전국에 145개 지부가 결성되었다. 대부분은 독립투사들과 지역 사회 유력자들이 위원장 및 주요 임원을 맡았다. 그런데 청주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청주에선 독립운동 경력은 고사하고 친일행위자들이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감투를 썼다. 이는 일제강점기 청주에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농민운동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에 기반한 민족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의 역사가 취약했기에 반민족행위자(친일협력자)가 건국 도상의 전면에 나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WELCOME US ARMY

일제로부터의 조선독립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조선 민중들의 처절한 독립 투쟁에도 일제의 결정적 패망은 '강대국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정이, 이북은 소군정이 점령했다. 9월 8일,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10월 1일 미군 선견분대가 청주에 진주했다. 제35 군정 중대는 11월 1일 청주에 도착했다(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지역 우익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재인용).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던 미 보병 제7사단 27연대 병력이 인천 상륙 후 철도 수송편으로 청주역에 도착한 것이다. 청주에 주둔한 제35 군정 중대는 장교 12명, 사병 46명이었다.

그날 청주시민 다수와 7개 중학교 학생들은 'WELCOME U.S. ARMY'라는 붓글씨 플래카드와 태극 깃발을 들고 청주역(현 청주도시재생허브센터, 필자 주)에서 도청에 이르는 본정통 도로 양측에 도열하여 제법 규모 있는 환영행사를 열었다(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껌을 씹는 병사와 간간이 카빈총을 거꾸로 어깨에 둘러멘 채 히죽히죽 웃으며 보조도 맞지 않게 행군을 하는 미군을 맞이한 것은 정교원 충북도지사였다. 정교원 지사와 도청 직원들은 맥주·포도주·정종 등 주류와 기타 기호품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성대한 환영을 받은 미군은 일본 학생들이 다니던 제2중학교(현 청주공고)와 병사구사령부(현 충북진로교육원 근처), 대마공장(현 청원경찰서)에 막사를 설치하고 주둔했다. 미 군정요원 등 고급 장교들은 탑동 양관 건물에 입주했다.

미군정,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다

미군정이 최초로 한 정치 활동은 '인민위원회의 불법화 조치'였다. 건국준비위회는 미군정 진주를 앞두고 인민위원회로 전환해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민중 본위의 민주개혁을 주창한 좌파를 정치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던 정치 세력을 부정하고,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를 이식하기 위한 사전적 조치였다.

충북인민위원회는 도내 10개 군 중 충주, 제천, 단양, 청주·청원, 보은, 옥천, 영동 등 7개 군에 있었다. 이 중 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수행한 지역은 제천, 옥천, 영동으로 3개 지역에 불과했다. 그만큼 청주의 인민위원회 세력은 취약했다.

청주의 인민위원회 세력이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은 사무실 위치에서도 엿볼 수 있다.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이 청주읍사무소 2층인데 반해 인민위원회 사무실은 청주관이라는 여관이었다. 인민위원회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배제는 고문(회) 조직구성에서도 나타났다. 17명의 도군정 고문 중 5명은 도군정 장관이 임명하였고 11명은 10개 군에서 선출하였다. 그 중에서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였던 인물은 2명뿐이었다.

고문회가 충북 도군정의 주요 관리 임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도군정의 간부급 인사 및 경찰 책임자에는 대부분 지역 유지 또는 월남한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도군정은 사람들이 정보에 무지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선전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군정의 정책과 역할 및 국내외 정세 등을 도내 전역에 알리기 위해 리플릿, 포스터, 주간 다이제스트, 주간 농민(미군정 공보국이 발행) 등을 도내 전역에 매주 배포하였다.

[참고 문헌]

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청주근세60년사화편찬위원회, <청주근세60년사화>, 1985
민주주의 민족전선 편집, <해방조선 1~2>, 1988
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 1989
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2004
충북학연구소, <해방과 전쟁기 충북자료집 1>, 2005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2010
청주시, <청주시지>, 2017
국사편찬위원회, '강동정치학원 출신 3인의 이야기', 2008
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지역 우익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충북역사문화연대, <지도 들고 청주시현대사 여행>, 2008
충북역사문화연대, '청주시현대사지도', 2008
森田芳夫, <朝鮮終戰의 記錄>, 1979
#건국준비위원회 #친일협력자 #구연직 #이명구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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