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기능이 8가지나... 손풍기 대신 양복 안주머니에 든 것

부채에 깃든 조선시대 선비들의 '팔덕선' 철학... 여름마다 인사동에서 '백선' 장만

등록 2025.07.26 15:52수정 2025.07.26 15:52
3
원고료로 응원
'인문학적 붓장난'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만나는 사유와 글쓰기의 기록입니다. 사십 년 편집자의 삶이 녹아든 이 조용한 장난이 누군가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기자말]

부채 모음 시원한 부채 바람.
▲부채 모음 시원한 부채 바람. 이명수
"허이야!"

명창의 외침이 허공을 가른다. 팔목이 한 바퀴 휘돌며 손에 쥔 부채가 쫙 펼쳐지는 순간, 한 폭의 그림처럼 무대 위에 선명한 선이 그어지고, 공기가 갈라진다. 그 틈 사이로 이야기가 스민다. 부채는 단순한 소품을 넘어, 무대의 리듬이자 장면을 전환하는 문이 된다. 심봉사의 지팡이로, 이몽룡의 얼굴을 가리는 장막으로, 흥부의 톱질 소리로 변주되며 부채는 장면마다 새로운 존재로 환생한다.


손끝에서 시작된 한 동작이 무대의 여백을 열고, 그 여백에 이야기가 숨을 쉰다. 나에게도 부채는 그저 바람을 부치는 도구 이상이다. 해마다 여름이 오기 전, 인사동에 가서 백선(白扇) 몇 자루를 장만하는 일이 여름을 맞이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양복 안주머니에는 늘 한 자루쯤 부채가 들어 있다.

손풍기 대신 '백선'을 드는 이유

요즘 젊은이들은 손풍기를 들지만, 나는 부채의 조용한 여백, 손끝의 느린 바람이 더 정겹다. 에어컨은 시원하지만 삭막하고, 부채는 조용히 말을 건네며 여름을 함께 건넌다. 값비싼 예술품은 아니지만, 백선 위에 시 한 줄을 쓰는 순간 그 부채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바람보다 글씨가 먼저이고, 시보다 마음이 앞선다. 바람을 부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부채는 본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였지만, 조선 시대 선비들은 그 쓰임새를 '팔용선(八用扇)' 또는 '팔덕선(八德扇)'이라 부르며, 단순한 실용을 넘어 풍류의 철학으로 정리했다.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써본 여덟 가지는 곧 여덟 갈래 삶의 방식이다.

1. 청풍을 일으킴 : 손목을 흔들어 여름의 더위를 쫓는다.
2. 작열을 가림 : 햇볕을 막아 이마 위 그늘을 드리운다.
3. 낯을 숨김 : 어색한 순간, 부채로 얼굴을 가려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4. 충해를 물리침 : 날벌레를 쫓으며 작은 평안을 지킨다.
5. 비를 막음 : 갑작스러운 소나기 속, 머리 위 즉석 우산이 된다.
6. 지시와 초빙 : 선비가 정중히 손님을 초대하듯, 부채로 품위 있게 방향을 가리킨다.
7. 창법 도우미 : 육자배기 한 가락에 흥을 실어 무대의 리듬을 돋운다.
8. 풍류를 즐김 : 선면에 생각 한 줄을 써넣으며 삶의 멋과 여유를 드러낸다.


이 여덟 가지 쓰임새는 모두 '바람'이 아닌 '관계'를 향한다. 몸과 자연, 사람과 사람, 나와 감정 사이를 잇는 다리. 부채는 그저 실용을 넘어선 사유의 도구이자, 품격을 띤 삶의 태도다.

마음을 부치는 바람


나는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을 '선풍고아(扇風高雅)'라 부른다. 비록 내가 만든 말이지만, 이 말엔 오래된 품격을 담고 싶었다. 단지 더위를 식히는 바람이 아니라, 사유를 불러오는 고요한 여백. 무더운 날 부채를 부치며 한 줄 시를 떠올리는 순간, 마음의 열기는 스르르 식어간다.

더위보다 뜨거운 것은 언제나 마음이다. 억울함, 분노, 갈증 같은 감정들이 속을 끓일 때, 나는 부채를 집어 들고 천천히 부친다. 그 움직임 속에서 나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눈동자 속에도 맑은 바람이 인다.

지난 5월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선우풍월(扇友風月)' 전시를 찾았다. 추사 김정희의 필체가 새겨진 백선, 단원 김홍도의 인물화가 담긴 부채를 마주하고 있자니 그것은 단지 여름 도구가 아니었다. 시이자 서신이었고, 그림이자 사유의 장이었다. 선면(扇面) 위의 글씨와 풍경은 고요하면서도 품격 있었고, 그 자체로 한 조각의 여름을 품고 있었다. 백선 스무 자루를 앞에 두고 붓을 들며 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글씨를 쓸까. 시 한 줄이어도 좋고, 짧은 경구 하나여도 충분하다.

淸風滿扇 맑은 바람이 부채에 가득하네
▲淸風滿扇 맑은 바람이 부채에 가득하네 이명수

"일소청량(一笑淸涼) 웃음 한 번으로 더위가 싹 가시네."
"청풍만선(淸風滿扇) 맑은 바람이 부채에 가득하네."

백선은 나에게 작은 우주다. 그 위에 쓰는 글씨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마음의 결이다. 그 결이 바람을 일으키고, 마음의 먼지를 조용히 날려 보낸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무더운 여름날, 방바닥에 앉은 어머니가 둥근 부채로 내 이마를 부쳐 주시던 장면. 그 바람은 단지 시원함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 자장가보다 깊은 위로, 찬물보다 시원한 온기. 그 바람 속엔 여름의 더위도, 어린 나의 근심도 모두 스며 있었다.

지금 내가 백선 위에 글씨를 쓰는 이유는, 어쩌면 그 손길을 되살리는 일이 아닐까. 단지 '풍류'를 위한 붓장난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에 대한 작고 단단한 예의처럼.

바람은 시를 싣고, 부채는 그 시를 펼친다

요즘 '부채질한다'라는 말은 종종 부정적으로 쓰인다. 누군가를 선동하거나 부추긴다는 의미로 말이다. 댓글에도 "부채질 그만하라"는 표현이 더러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살짝 불편하다. 원래 부채는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였고, 여름을 함께 나는 벗이었다.

"부채질한다고 시원해집니까?"

누군가 묻는다. 나는 조용히 웃는다. 말로는 다 설명 못 할 시원함, 마음의 열기를 식히는 그 한 줌의 바람을 그는 아직 모른다. 부채가 일으키는 것은 단지 공기의 흐름이 아니다. 나와 감정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한 줌의 여백. 그 틈에서 우리는 웃고, 생각하고, 쉬어 간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들었다. 습관이었는지,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였는지, 중국 사람들은 '겨울에도 부채 드는 민족'이라 놀렸지만, 나는 오히려 그 안에 조선의 풍류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름 산행을 할 때도 배낭에 백선을 한두 자루 챙긴다. 혼자 앉아 붓을 들어 바람을 쓰듯 한 자 한 자 쓱쓱 쓴다. 누군가 그 부채를 받아 들고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면, 그것이 내가 붓을 드는 이유다.

오늘도 나는 부채를 든다. 한 손엔 바람을 부치는 부채, 다른 손엔 마음을 적시는 붓. 그리고 마음 한편에는 오래된 시 한 편을 간직한다.

"바람은 시를 싣고, 부채는 그 시를 펼친다."

백선 위에 붓을 들며 나는 생각한다. 손끝을 따라 흐르는 그 바람은, 어디선가 한 번쯤 받았던 사랑의 결일지도. 이 붓장난이란, 결국 살아온 시간을 다독이는 내 여름 의식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아차산에서. 心 팔만대장경을 260자로 줄이면 반야심경이 되고, 반야심경을 다시 5자로 줄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압축되며, 일체유심조를 1자로 압축하면 마음, 즉 心이 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아차산에서. 心 팔만대장경을 260자로 줄이면 반야심경이 되고, 반야심경을 다시 5자로 줄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압축되며, 일체유심조를 1자로 압축하면 마음, 즉 心이 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이명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립니다.당부의 말씀: 만약 게재가 된다면 사진 1~8은 뺄 것은 빼고 모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밭 전(田) 자 모양으로 두 장 두 장을 배치하든지, 석 장 석 장을 배치하든지 보기 좋게 부탁합니다.
#시원한부채바람 #선풍고아扇風高雅 #일소청량一笑淸? #여덟 #갈래의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4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철학하는 바보』『깨달음을 얻은 바보』『동방우화』『불교우화』『한국인과 에로스』『중국인과 에로스』 등의 저서가 있음.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삼남매가 결혼할 때 엄마에게 해드린 진상품, 승자는? 삼남매가 결혼할 때 엄마에게 해드린 진상품, 승자는?
  2. 2 "아파트 단지 통행불가? 법으로 막자" 어느 건축가의 이색 제안 "아파트 단지 통행불가? 법으로 막자" 어느 건축가의 이색 제안
  3. 3 "우린들 새 잡고 싶어 잡겠나" 어민 절망 속 바다새 1만 마리의 죽음 "우린들 새 잡고 싶어 잡겠나" 어민 절망 속 바다새 1만 마리의 죽음
  4. 4 단종 왕비의 한이 서린 곳인데 흔적조차 없는 사연 단종 왕비의 한이 서린 곳인데 흔적조차 없는 사연
  5. 5 바다 위 흉물처럼...관광객마저 탄식한 동해안의 '상처' 바다 위 흉물처럼...관광객마저 탄식한 동해안의 '상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