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반이 약해졌다고요? 그 설명이 제일 약합니다

[주장] 산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빗물 흐름을 바꾼 설계가 문제다

등록 2025.07.24 10:19수정 2025.07.2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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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산청 폭우로 인한 산사태 등 피해 현장. 산청읍 자신마을.
경남 산청 폭우로 인한 산사태 등 피해 현장. 산청읍 자신마을. 이제항

"폭우로 지반이 약해졌다"

산사태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말은 산림청의 공식 설명처럼 굳어졌다. 관계기관과 언론도 이 말을 자동처럼 되풀이한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 지반이 정말로 약했다면, 왜 어제까지는 멀쩡했는가? 그 산은 이번에 처음 비를 맞은 것인가? 왜 어떤 산은 같은 비를 맞고도 무너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진짜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태풍이 자주 지나가고, 폭우가 쏟아지는 대만과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왜 "지반이 약해져서 무너졌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가?

산은 그렇게 무르지 않다

산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버텨온 자연의 구조물이다. 비는 매년 왔고, 태풍도 여러 번 지나갔다. 그런 산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면, 그건 산의 탓이 아니다. 그 산을 흐르던 물길을 바꾸고, 구조를 훼손한 인간의 탓이다. 나는 경기도 광주의 야산에서 3년간 빗물 침투 실측을 진행했다. 아무리 많은 비가 와도 경사면에서는 빗물이 깊이 스며들지 않는다. 대부분은 흘러내린다. 결국 산사태의 원인은 "지반이 무거워져서"가 아니라 "물이 스며들지 못하고 모아진 빗물이 흙을 쓸고 내려가면서" 생기는 것이다.

하나가 무너지면 줄줄이 무너진다

산사태는 단발성이 아니다. 첫 번째 무너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위에서 떨어진 흙과 돌은 높이에 비례한 위치에너지를 갖고 아래로 내려오며 더 많은 흙과 나무를 밀어내고 파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처럼 산사태는 연쇄작용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물이 몰린 구조가 있다. 그 물길을 만든 것은 비가 아니라 인간이다.

비가 많이 온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없게 왔다


문제는 절대량이 아니다. 상대량이다. 같은 100mm라도 평지에 고루 퍼지면 아무 일도 없다. 하지만 임도 배수로를 타고 계곡으로 집중되면, 20mm의 비도 산을 무너뜨린다. 이렇게 한쪽으로 몰린 물, 즉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쏟아진 물이 산사태를 일으키는 진짜 원인이다.

옹벽은 설계로 버틴다, 산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비가 오면 위험한 구조물 중 하나가 옹벽이다. 빗물은 흙 뒤에서 압력을 가해 옹벽을 밀어낸다. 하지만 제대로 설계된 옹벽은 배수구를 두어 물을 빼낸다. 그래서 물의 무게를 줄이고, 구조를 지킨다. 그런데 옹벽 하나가 무너지면 그 원인을 분석하기보다 "비가 많이 와서"라고 말한다. 설계를 잘못한 문제는 사라지고, 자연만 탓한다. 산도 마찬가지다. 임도와 배수로로 물을 한쪽에 몰아놓고
"지반이 약해져서"라고 말하는 건 흙이 아니라 설명이 무너진 것이다.

잘못된 진단이 반복되면, 피해는 더 커진다

지금까지처럼 물의 흐름을 무시한 채, 토양·경사·식생만 보고 위험지역을 판단한다면 다음 해, 그다음 해에는 더 큰 재난이 닥칠 것이다. 문제는 폭우가 아니라 정책의 흐름, 해답은 사방댐이 아니라 유출계수에 있다(관련기사: '끊어진 가방끈', 또 사방댐?). 임도가 있는 지역의 하부는 다시 검토되어야 하고, 물의 흐름을 중심에 두는 평가 기준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한다.

대통령께 묻고 싶다

대통령은 "예측된 피해를 막지 못하면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현장 책임자 몇 명의 교체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진단을 잘못하고도 예산을 짠 사람, 틀린 처방을 알고도 정책을 밀어붙인 사람, 경고를 무시한 채 구조를 반복한 모든 정책 결정자들이 이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 무너진 것은 산만이 아니다. 정책의 근거, 행정의 신뢰, 과학의 설계가 함께 무너졌다. 이제는 그 위에 새로운 기준을 세워야 한다.(관련기사: 기후재난의 해법, 기술보다 철학이다).
덧붙이는 글 “지반이 약해졌다”는 말은 편하다. 원인을 깊이 따질 필요도 없고, 책임을 가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은 쉬워지고, 문제는 반복된다. 산은 하루아침에 약해지지 않는다. 약해진 것은 산이 아니라, 진단이고, 설계이며, 대응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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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물어야 한다. 왜 무너졌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흐름이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그 흐름을 바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산을 탓하는 말 대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아질 때 비로소 우리는 더 강한 사회, 더 단단한 산, 더 안전한 내일을 만들 수 있다.
#산사태 #대통령의경고 #물모이 #폭우로약해진지반 #유출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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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빗물박사.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빗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다목적 분산형 빗물관리를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것을 학문적, 실증적으로 국내외에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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