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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 해방 직후 청주의 적산 쟁탈전

[청주 기억여행 1945~1960 ③] 해방 후 청주 경제·사회 상황

등록 2025.08.18 15:05수정 2025.08.1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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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기자말]
"야! 맘에 드는 건물 하나 골라 봐."
"알겠습니다, 형님."

어깨에 잔뜩 힘을 준 건달들은 본정통(성안길)을 휘저어 다녔다. 괜찮다 싶은 건물은 죄다 일본식 가옥이거나 상점이었다. 본정통 안의 상가는 특별히 욕심나는 건물이 없었다. 대부분 상가였기 때문이다.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

"여기 쓸만한데!"

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감탄한 곳은 도립병원(현재 청주문화관 터) 옆 건물이었다. 가와지마(川島) 집이었다. 번듯한 건물로, 자신들의 사무실로 쓰기에는 최고 적합했다. "단장님, 여기를 사무실로 쓰시죠"라는 단원의 의견에 김팽조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그렇게 해서 1945년 8월 말 창립한 의혈단은 적산(敵産) 가옥을 사무실로 만들어버렸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거나 매매계약서를 쓰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청주 경제, 사회 상황 시가도 해방 후 청주 경제, 사회 상황 시가도
▲청주 경제, 사회 상황 시가도 해방 후 청주 경제, 사회 상황 시가도 박만순

해방 직후, 청주 사회는 무정부 상태였다. 특히 일본인 상점과 가옥이 밀집해 있던 본정통과 문화동은 더욱 그랬다.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였다. 오창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경찰을 지낸 유도 4단의 김팽조가 창설한 의혈단도 적산 가옥을 자신들의 사무실로 만들었다.


대한민청·대동청년단·대한청년단 충북도단부 선전부장이자 제2대 청주시의원을 역임한 최동찬과 <도정반세기>의 저자인 이승우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직후 적산(敵産)은 4가지 방식으로 불하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종업원들이 차지한 사례로 감천당, 회춘당, 청주약국이 있다.

주먹패가 주택을 점유한 사례도 있다. 좌익이 적산을 활용한 것은 청주관이라는 여관을 사용한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청·남로당 사무실로 사용된 북문로 건물이 대표적이다. 우익은 앞의 의혈단과 학생연맹 등이 적산을 차지했다. 학생연맹은 청주약국 네거리 근처 건물 2층을 사용했다.


좌익이 사용한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실은 남로당과 민애청이 1947년에 불법화되면서 강제 폐쇄되었다. 좌익이 점유한 적산을 제외하고, 우익이나 유력자, 상인, 노동자 등이 점유한 적산은 미군정에 의해 묵인되었다. 물론 기업체를 제외하고 말이다.

민족의 자산

적산이라 함은 일제국주의가 강탈한 조선의 유·무형의 재산을 말한다. 즉 적산은 원래 조선 민중의 소유물이다. 일부 사유재산은 고사하더라도, 국유지를 비롯한 사업체는 조선 민중 전체의 것이다. 그렇기에 새롭게 건설될 신생 조국의 경제적 자산이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적산 처리에는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군정은 철물과 도량형기를 팔던 가끼하리 상회(옛 흥업백화점 자리)에 적산처리처(관재처의 전신) 사무실을 두었다.

미군정은 적산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귀속재산이라고 했다. 관련 법령은 1945년 12월에 만들어졌다. 미군정은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일본인 재산이 미군의 전리품임을 확인하고자 1945년 12월 6일부로 미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 명의로 '재산 이양에 관한 포고령' 제33호를 공포했다.

그 내용은 "1945년 8월 9일 이전에 일본 정부, 기관, 일본 국적 민간인들이 소유한 한국 내의 일체 동산, 부동산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군정에 귀속한다"는 것이었다(이한구, 귀속기업 불하가 재벌 형성에 미친 영향, 2007).

남한제사 1950년대 남한제사
▲남한제사 1950년대 남한제사 청주시현대사지도

관련 법령은 마련되었지만 시행은 매우 더디었다. 1947년 현재 충북 지역 동산은 전부 불하되었고, 부동산 불하에 착수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본격적인 귀속 사업체 불하가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 남한제사가 그렇다. 1928년 창립한 남한제사 주식회사는 1951년 이도영에게 불하되었다(김양식, '해방 이후 충북 지역 귀속 사업체 연구', 2000).

1951년 현재 충북의 귀속 기업체는 101개였다. 귀속 기업(敵産)은 미군정기 귀속 사업체 관리인, 일제 말 기업가·공무원에게 주로 불하되었다. 위와 같이 적산 불하는 국가의 공공재산 관리라는 관점에서 처리된 것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기업가 및 관리, 공무원에게 불하되었고, 이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가 고착화되는 데 악영향을 끼쳤다.

STOP CLOCK 카바레

"Welcome to STOP CLOCK."

어두컴컴한 건물에 들어선 흑인 군인들에게 들려온 소리였다. 검정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웨이터들의 인사말이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현란한 조명이 가슴을 들뜨게 했다. 빈자리로 안내된 흑인 병사들은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잠시 후 무대에서는 옆구리가 툭 터진 치마를 입은 고혹적인 여성 가수가 등장했다. 사방에서 손님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해방 직후 청주우체국 근처에 생긴 'STOP CLOCK 카바레'였다. 영어 이름을 풀이하면 '시간을 멈추는(멈춰라!) 카바레'라는 뜻이다. 즉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춤추고 술 마시는 유흥주점이다.

해방 직후 소도시인 청주에 이런 카바레가 들어선 것은 순전히 '미군들 때문'이었다. 1945년 11월 청주에 미군정부대가 들어오면서 그들을 위한 오락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공창(公娼)과 고급 요리점은 영업을 재개했다. 일명 바이게쓰(梅月)라 불린 공창은 남문로 2가 '욕쟁이 할머니 식당' 뒤편에 있었다. 남주동 약전골목(현 가구점 골목)에는 화월(花月)이라는 공창이 있었다.

1946년 12월 2일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10월 28일 '공창제도 등 폐지령'을 의결했다. 1948년 3월 19일 미군정 장관이 위 폐지령을 행정명령 제16호로 발포해 공창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때까지 공창은 시내 한복판에서 버젓이 영업 행위를 벌였다.

남문로 1가의 충북 경찰학교 근처에 있었던 북일루(北一樓)는 요정과 숙박업을 겸한 고급 요리집이었다. 남주동에 있던 화성관은 기생을 20명이나 두고 영업을 했다. 이곳은 주로 미군정 관리와 미군, 조선인 유력자들이 이용했다.

해방 후 충북 최초의 다방인 샛별다방이 청주약국 근처에 만들어졌다. 김태환이 해방 후 서울에서 내려와 다방을 열은 것이다. 당시 약 40세였던 마담이 종업원 두 명을 두었다. 마담은 카운터에 앉아있고 종업원은 긴 치마에 정장을 입었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는 이들은 커피 맛은 제대로 몰랐지만, 신사로 불리는 것을 즐겼다.

오페라다방 1957년 문화예술인의 모임. 서있는 사람은 변호사이며 문인이었던 최병길. 오페라다방에서.
▲오페라다방 1957년 문화예술인의 모임. 서있는 사람은 변호사이며 문인이었던 최병길. 오페라다방에서. 청주시현대사지도

후에 오페라다방이 만들어져 청주의 커피 문화를 이어 나갔다. 오페라다방은 1950년대에 지식인과 문인들이 자주 이용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교향곡, 세레나데 등의 클래식 음악을 주로 틀었고, 대중가요는 전혀 틀지 않았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청주 최고의 문화공간은 청주극장이다. 해방 후 박남용(여)이 경영했다. 당시 영화 상영 홍보는 이채로웠다. 남녀 배우들이 인력거를 타고, 현수막을 몸 앞뒤에 건 채 청주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스텝은 깃대를 들고, 징과 꽹과리를 쳤다. 해방 후에는 청주극장이 정치 집회의 주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통신 vs. 국민일보

해방 후 인민위원회는 빠르게 <통신>이라는 신문을 발간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자신들에 비판적인 <통신>을 강제 폐간 조치했다. 이는 인민위원회와 인민공화국에 대한 전면 부정 조치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반면 미군정은 우익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국민일보> 창간을 허가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군정은 충북 지방의 통치권을 점차적으로 인민위원회로부터 빼앗았다. 우익 단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미군정-경찰-군인-우익 단체라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 지역 우익 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1946년 3월 1일 창간된 <국민일보>의 사장은 김원근, 부사장은 김동환, 편집국장은 서천순이었다. 후일 초대 민선시장(1956.8.15 ~ 1957.11.19)이 되는 홍원길은 <국민일보> 창간에 산파 역할을 했다. 그런데 김원근은 일제 시기에 청주에서 남선상사 주식회사와 충북산업 주식회사를 경영한 지역 유지였다.

그는 대성보통학교, 청주상업학교, 청주여자상업학교를 설립해 지역 교육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 충청북도 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충청북도 발기인과 평의원 등을 지낸 친일 경력이 있다(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파 인명사전>, 2010).

중앙언론 지역 지국도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청주지국이었다. <동아일보>는 홍원길이 지국을 만드는데 동분서주했다. <동아일보> 충북판은 별도로 인쇄되었고, 타블로이드판 1면은 정치, 2면은 사회를 다루었다.

<조선일보>는 좌익 인사들이 지국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지국장은 청주군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한 홍봉희였고, 해방 후에는 유만형이 지국장을 맡았다. 즉, 해방 후 청주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각각 우익과 좌익을 대변하는 신문 역할을 한 것이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청주 kbs 청주방송국을 방문한 청주시내 초등학생들. 1953년.
▲청주 kbs 청주방송국을 방문한 청주시내 초등학생들. 1953년. 이승우

KBS 청주지국은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16일, 청주시 탑동의 양관(洋館)에서 첫 방송을 시작했다. 8.15 해방 후 구리드 변조식 출력 50W 송신기 1대를 설치하였다. 1946년 11월 8일부터는 하루 두 차례에 걸친 지방뉴스가 방송되었고, 월 1회 정도의 오락 방송도 실시되었다(한국방송문화협회, <KBS 연감>, 1961)

고무신공장

일제강점기부터 영업했던 상점과 기업체들이 해방되면서 기지개를 폈다. 해방 후에는 많은 상점과 기업체가 문을 열어 청주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대동강'이라는 상표의 고무신을 생산한 청주합동고무공업사는 1948년 6월에 설립되었다. 사장 박창현, 생산 품목은 고무신, 운동화, 농구화, 훈련화, 고무공, 학동용 딱게 고무였다. 1951년 기준 월 생산 80만 족(足)으로 충북, 충남, 강원, 경기, 전북 일대까지 상권을 획득했다.

각종 고급 모자를 판매한 갑자옥과 시계 판매·수리 및 축음기를 수선한 천보당 시계점(사장 고순봉)은 남문로 2가 55번지에 위치했다. 북문로 2가에 위치한 북일여관은 외지에서 온 손님들이 하루 묵는 숙소로 애용되었고, 전화번호는 259번이었다.

북일여관 1960년대 사회장 (좌측에 청주 대표적 여관인 북일여관이 보인다).
▲북일여관 1960년대 사회장 (좌측에 청주 대표적 여관인 북일여관이 보인다). 청주시현대사지도

1949년에 설립된 충북문화사는 <의병대장 한봉수> 등의 책을 발간한 출판사로, 청주 지역 출판 문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피혁 공장은 일제시대 건육공장인 일축주식회사의 후신이다. 일축주식회사는 쇠고기를 양념해 말린 건육을 생산한 군수 공장이다. 지배인 서병두가 해방 후 적산 불하를 받았다. 현 사직동 국보제약 부근에 있던 도살장에서 매일 소 30~40마리분의 소가죽으로 가방, 구두 등의 제품을 생산했다.

일제강점기 군수품 공장이었던 대마공장은 해방 후 대마(大麻)를 생산했다. 현재 청원경찰서 자리에 있던 대마공장은 이후 청주방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민일보사, <충북연감>, 1952 / 충북역사문화연대, '청주시 현대사지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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