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다방 1957년 문화예술인의 모임. 서있는 사람은 변호사이며 문인이었던 최병길. 오페라다방에서.
청주시현대사지도
후에 오페라다방이 만들어져 청주의 커피 문화를 이어 나갔다. 오페라다방은 1950년대에 지식인과 문인들이 자주 이용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교향곡, 세레나데 등의 클래식 음악을 주로 틀었고, 대중가요는 전혀 틀지 않았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청주 최고의 문화공간은 청주극장이다. 해방 후 박남용(여)이 경영했다. 당시 영화 상영 홍보는 이채로웠다. 남녀 배우들이 인력거를 타고, 현수막을 몸 앞뒤에 건 채 청주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스텝은 깃대를 들고, 징과 꽹과리를 쳤다. 해방 후에는 청주극장이 정치 집회의 주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통신 vs. 국민일보
해방 후 인민위원회는 빠르게 <통신>이라는 신문을 발간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자신들에 비판적인 <통신>을 강제 폐간 조치했다. 이는 인민위원회와 인민공화국에 대한 전면 부정 조치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반면 미군정은 우익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국민일보> 창간을 허가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군정은 충북 지방의 통치권을 점차적으로 인민위원회로부터 빼앗았다. 우익 단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미군정-경찰-군인-우익 단체라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 지역 우익 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1946년 3월 1일 창간된 <국민일보>의 사장은 김원근, 부사장은 김동환, 편집국장은 서천순이었다. 후일 초대 민선시장(1956.8.15 ~ 1957.11.19)이 되는 홍원길은 <국민일보> 창간에 산파 역할을 했다. 그런데 김원근은 일제 시기에 청주에서 남선상사 주식회사와 충북산업 주식회사를 경영한 지역 유지였다.
그는 대성보통학교, 청주상업학교, 청주여자상업학교를 설립해 지역 교육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 충청북도 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충청북도 발기인과 평의원 등을 지낸 친일 경력이 있다(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파 인명사전>, 2010).
중앙언론 지역 지국도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청주지국이었다. <동아일보>는 홍원길이 지국을 만드는데 동분서주했다. <동아일보> 충북판은 별도로 인쇄되었고, 타블로이드판 1면은 정치, 2면은 사회를 다루었다.
<조선일보>는 좌익 인사들이 지국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지국장은 청주군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한 홍봉희였고, 해방 후에는 유만형이 지국장을 맡았다. 즉, 해방 후 청주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각각 우익과 좌익을 대변하는 신문 역할을 한 것이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청주 kbs 청주방송국을 방문한 청주시내 초등학생들. 1953년.
이승우
KBS 청주지국은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16일, 청주시 탑동의 양관(洋館)에서 첫 방송을 시작했다. 8.15 해방 후 구리드 변조식 출력 50W 송신기 1대를 설치하였다. 1946년 11월 8일부터는 하루 두 차례에 걸친 지방뉴스가 방송되었고, 월 1회 정도의 오락 방송도 실시되었다(한국방송문화협회, <KBS 연감>, 1961)
고무신공장
일제강점기부터 영업했던 상점과 기업체들이 해방되면서 기지개를 폈다. 해방 후에는 많은 상점과 기업체가 문을 열어 청주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대동강'이라는 상표의 고무신을 생산한 청주합동고무공업사는 1948년 6월에 설립되었다. 사장 박창현, 생산 품목은 고무신, 운동화, 농구화, 훈련화, 고무공, 학동용 딱게 고무였다. 1951년 기준 월 생산 80만 족(足)으로 충북, 충남, 강원, 경기, 전북 일대까지 상권을 획득했다.
각종 고급 모자를 판매한 갑자옥과 시계 판매·수리 및 축음기를 수선한 천보당 시계점(사장 고순봉)은 남문로 2가 55번지에 위치했다. 북문로 2가에 위치한 북일여관은 외지에서 온 손님들이 하루 묵는 숙소로 애용되었고, 전화번호는 259번이었다.

▲북일여관 1960년대 사회장 (좌측에 청주 대표적 여관인 북일여관이 보인다).
청주시현대사지도
1949년에 설립된 충북문화사는 <의병대장 한봉수> 등의 책을 발간한 출판사로, 청주 지역 출판 문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피혁 공장은 일제시대 건육공장인 일축주식회사의 후신이다. 일축주식회사는 쇠고기를 양념해 말린 건육을 생산한 군수 공장이다. 지배인 서병두가 해방 후 적산 불하를 받았다. 현 사직동 국보제약 부근에 있던 도살장에서 매일 소 30~40마리분의 소가죽으로 가방, 구두 등의 제품을 생산했다.
일제강점기 군수품 공장이었던 대마공장은 해방 후 대마(大麻)를 생산했다. 현재 청원경찰서 자리에 있던 대마공장은 이후 청주방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민일보사, <충북연감>, 1952 / 충북역사문화연대, '청주시 현대사지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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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 해방 직후 청주의 적산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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