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소년 김대중 공부방' 앞 배롱나무 뜨거운 햇살 아래 피어난 배롱나무처럼, 소년 김대중의 꿈도 이곳에서 자라났다.
김지은
배롱나무의 꽃말이 '떠나간 임을 그리워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꽃을 볼 때마다 아련히 스며드는 그리움의 뿌리를 그제야 깨달았다.
백일 동안 지고 피는 생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 없다는 말은 배롱나무 앞에서 조용히 무너진다. 뜨거운 한여름 햇살 아래서 이 꽃은 무려 백일을 붉게 피워낸다. 도종환 시인은 <목백일홍>에서 그 비밀을 이렇게 노래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정말 그러하다. 배롱나무는 지고, 피고, 다시 피며 백일을 감내한다. 그 붉음은 한순간의 절정이 아니라, 묵묵한 반복의 결과다.
내가 불교방송 '명상의 시간' 원고를 집필할 때 초청을 받아서 갔던 강진 백련사에서 본 200년 된 배롱나무 고목도 그러했다. 비 내리는 새벽,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으며 만경루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나무는 고요히 붉은 꽃을 피운 채 비를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시간을 멈춘 듯했고, 손에 닿는 비에 젖은 수피에는 오래된 세월이 스며 있었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그 풍경은 지금껏 마음속에 몽환처럼 남아 있다.
사리꽃
배롱나무만큼 많은 이름을 가진 나무도 드물다. 처음엔 '백일홍'이라 불렸지만, 멕시코 원산의 초본 백일홍과 구분하기 위해 '목백일홍(木百日紅)'이 되었다. 줄기가 매끄럽고 간지럼을 타듯 흔들려 '간지럼나무', '바람나무'라 불렸고, 고고한 자태로 '선비나무'란 별칭도 얻었다. 중국에선 '자미화(紫薇花)' 또는 '파양수(怕癢樹)'라 하고, 일본에선 '사루스베리(猿滑)'라 하여 원숭이도 미끄러진다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이 많다는 것은 오래도록 불렸다는 것이며, 오래 불린 것에는 사연이 있다. 서울 국립현충원의 배롱나무도 기억에 남는다. 충절과 신념의 묘역을 배경으로, 이 나무는 고요히 꽃을 피운다. 나는 해마다 8월,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이곳을 찾는다. 애국자라서가 아니라, 이 땅에 뿌리 내린 사람으로서 출생과 성장의 빚진 마음 때문이다. 현충원을 걷다가 배롱나무꽃 앞에 서면, 사육신 성삼문의 시가 떠오른다.

▲백일홍/성삼문 백일 붉게 피어 절개를 지킨 꽃, 성삼문의 마음이 이 붉음 속에 스민다. 이는 자연의 노래이자, 지조의 시다. 나는 이 시를, 절개의 꽃으로 기억한다.
이명수
昨夕一花衰(작석일화쇠)
今朝一花開(금조일화개)
相看一百日(상간일백일)
對爾好衡杯(대이호형배)
"어젯밤엔 한 송이 꽃이 졌지만, 오늘 아침엔 또 한 송이가 피었네.
너와 나, 백일을 함께하며 잔을 기울이고 마음을 나누었지."
성삼문의 시 <백일홍>은 문자 그대로 자연의 순환을 읊은 감상시다. 그러나 사육신의 비극을 아는 이의 마음속에서, 백일 붉게 피었다 지는 이 꽃은 그가 지키려 했던 절개와 맞닿아 있다. 이는 논리의 결과라기보다, 한 사람의 생애와 시를 가슴으로 읽는 감정의 결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절개의 꽃으로 기억한다. 성삼문에게 이 꽃은 절개의 상징이었고, 청렴과 지조를 품은 마음의 그릇이었다.
내 어머니가 좋아했던 '생이꽃'은 누구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몰고오는 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절집 뜰, 사당의 뜨락, 선비의 자취가 서린 공간마다 배롱나무는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고창 선운사 대웅전 앞, 뒤틀린 가지마다 타오르던 붉은 꽃송이를 보며 나는 이 꽃을 '사리꽃'이라 부르기로 했다. 마치 한여름 부처님 앞에 올리는 꽃 공양처럼, 생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듯한 그 붉음! 사리(舍利)처럼, 이 꽃은 영원한 순환과 거듭남을 품고 있다.

▲덕수궁 배롱나무 고궁의 배롱나무, 역사 위에 핀 100의 찬란함.
김범모
화개무성(花開無聲), 꽃은 소리 없이 핀다. 그 고요한 붉음은 겸손과 여유를 상징하고, 떠나간 이를 향한 조용한 그리움으로 깊어진다. 나는 배롱나무 앞에 설 때마다 '거듭남'을 곱씹는다. 어제의 시듦을 떨쳐내야 오늘의 꽃이 피어난다는 진실. 묵묵히,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한 번도 피우기를 멈추지 않는 이 나무의 삶은 내게 묵언의 성찰을 가르친다.
올여름도 배롱나무는 어김없이 붉다. 나는 그 앞에서 다시 다짐한다.
소리 없이 피고 지는 꽃처럼, 나도 묵묵히 삶을 이어가리라.
내 안의 사리꽃 하나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피어나기를.

▲국립현충원의 배롱나무 충절과 신념의 묘역 앞, 절개의 꽃은 아무 말 없이 피고 또 진다. 떠난 이들을 향한 조용한 인사처럼.
청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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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4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철학하는 바보』『깨달음을 얻은 바보』『동방우화』『불교우화』『한국인과 에로스』『중국인과 에로스』 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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