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간 이어온 주시경 참배의 길

한힌샘(한흰샘) 주시경 선생 서거 111주기를 맞아 찾은 현충원 제2 묘역 무덤

등록 2025.07.29 09:26수정 2025.08.0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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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한힌샘(한흰샘) 주시경 선생 서거 111주기(7월 27일)를 맞아 현충원 제2 묘역 무덤에서 추모식이 있었다. 추모식 뒤에는 한힌샘 주시경길 답사를 하며 주시경 선생이 남긴 뜻을 되새기는 답사 여정이 있었다.

<한힌샘 주시경길>은 한글학회가 2024년에 110주기를 맞아 세종국어문화원과 함께 조성한 길로 주시경 집터와 주시경마당에서부터 19살 무렵 입학했던 배재학당, 그리고 32살이었던 1907년에 국어강습소를 세운 상동교회, 1908년에 국어연구학회 창립식을 연 서울 서대문구 안산의 봉원사(봉원사길 120, 봉원동), 조선어학회 사무실 터가 있던, 북촌 한옥 마을, 종로구 화동 124번지를 답사하는 길로 필자가 2024년부터 해설을 맡고 있다.


주시경 선생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

1977년, 철도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한글학회 부설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 일명 '한글나무'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해 가을, 처음으로 주시경 선생님의 무덤을 참배했다. 1978년 한글날 무렵의 일이었다.

1978년 필자 철도고 2학년 한글날 무렵, 주시경 무덤 참배 사진 맨 윗줄 맨 오른쪽 현 박덕영 연세대 법대 교수, 그 옆 필자, 가운뎃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당시 오동춘 지도교사(대신고, 현 짚신문학회 명예회장), 맨 아랫줄 맨 왼쪽 서갑숙 배우(딩시 숙명여고 2) @김슬옹
▲1978년 필자 철도고 2학년 한글날 무렵, 주시경 무덤 참배 사진 맨 윗줄 맨 오른쪽 현 박덕영 연세대 법대 교수, 그 옆 필자, 가운뎃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당시 오동춘 지도교사(대신고, 현 짚신문학회 명예회장), 맨 아랫줄 맨 왼쪽 서갑숙 배우(딩시 숙명여고 2) @김슬옹 김슬옹

흑백사진 속 열여덟 시절의 모습을 보니 47년간의 삶이 시원한 강물처럼 흘러간다. 이 사진 속 인물들은 선배들이 몇 있지만, 대부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동기들이다. 우리는 1975년에 창립한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한글나무)의 4기 벗들이었다. 모두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모인 청춘들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의 묘소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지만, 오동춘 선생님(당시 대신고 교사, 현 짚신문학회 명예회장)의 따뜻한 안내 아래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걸었다. 묘비에 새겨진 "한힌샘 상주 주시경 스승의 무덤"이라는 글자는 어린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한힌샘'은 호이고 '상주'는 '상주 주씨' 본을 가리킨다.

주시경 선생님의 유해는 세 번의 이장을 거쳤다. 처음엔 현재의 은평구 신사동 고택골에, 1960년에는 남양주로, 그리고 1981년 마침내 국립현충원 제2 묘역으로 옮겼다. 나는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며 47년간 거의 매해 추모의 발걸음을 이어왔다.


지금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뜰에 있는, 남양주에 있던 묘비 뒤편에 새겨진 가족들의 이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들 삼산, 백산, 왕산, 딸 송산, 춘산, 손자(영철, 영일, 영석), 손녀(영진, 영옥, 영애, 소영), 외손(이완영, 고관주), 외손녀(이옥희, 이옥련, 고경애) 등. 안타깝게도 최근 1년간 한글학회 이사로서 조사해본 결과, 연락이 닿는 직계 후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 나는 한글의 참뜻을 배웠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하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을. 하지만 교실 밖 현실은 달랐다. 신문 배달을 하던 친구들이 가져다준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읽으며 1978년은 한글이 반포된 지 531년이었고 광복된 지 33년이 넘었던 건만, 한글은 여전히 한자 다음의 이류 문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이었다. 사대주의와 식민지 잔재를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마침 조선일보가 친절하게도 그때 신문을 잘 갈무리해 다시 볼 수 있었다.
한글운동가의 길을 걷도록 자극을 준 ‘1977년 10월 9일 조선일보’ 1면 (조선뉴스라이브러리 100).
▲한글운동가의 길을 걷도록 자극을 준 ‘1977년 10월 9일 조선일보’ 1면 (조선뉴스라이브러리 100). 조선일보

어떻게 500년이 넘도록 세종의 한글 꿈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런 어른들이 미웠고 철도공무원의 꿈을 접고 한글만 쓰는 세상을 위한 한글운동가, 한글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런 현실이 나를 더욱 주시경 선생님께 이끌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셨다면, 주시경 선생님은 그 한글을 되살려내신 분이셨다. 그리고 외솔 최현배 선생님은 그 뜻을 이어받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도 한글을 지켜내신 분이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글 선각자로 개화기 때의 헐버트 선생도 계셨다.


1980년 철도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일찍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 주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큰 사명이 있었다.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님의 뜻을 잇기 위해 그분의 학풍이 남아 있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1982년에 입학하여 한글 운동과 한글 연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 선택이 옳았음을 매년 7월 27일, 주시경 선생님의 서거일에 확인한다. 현충원 제2 묘역에서 열리는 추모식에 참석할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한다. 한글의 가치를 알리고 이제는 널리 나누는 일을 하며, 선생님들의 뜻을 이어가겠노라고. 이제 한글이 한류인 세상이 열리었지만, 한편 이 땅의 보수 신문들은 대부분 아직도 대한민국 이름과 대통령 이름조차 한글로 적지 않고 '韓, 李'와 같이 한자로 적으며 세종의 한글 정신과 대한민국 자존심을 훼손하고 있다.

한힌샘 주시경길에서

올해는 안국역 근처의 시위로 말미암아 조선어학회 사무실 터가 있는 곳은 가지 못했다. 2024년에는 비가 내렸는데 2025년은 불볕더위가 금방 온몸으로 땀으로 휘감아 모두 지친 탓도 있었다. 이 길을 걸으며 안내할 때마다 새삼 깨닫는다. 내가 걸어온 47년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한 고등학생이 품었던 작은 꿈이 평생의 소명이 되어,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그 길을 안내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음을.

주시경 선생님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분이 뿌린 한글사랑의 씨앗은 111년이 지난 지금 한류 열풍으로 번지고 있다. 얼마 전 김민석 국무총리는 초격차 에이펙(APEC)을 위해 신라의 미소와 더불어 한글을 내세우겠다고 공개 선언하기까지 했다.

매해 7월 27일이 오면, 나는 여전히 그 길을 걷는다. 47년 전 철도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소년의 마음으로, 그리고 이제는 한글학회 이사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으로. 세종대왕이 창제ㆍ반포하시고, 헐버트, 주시경 선생님이 되살리시고, 최현배 선생님과 선각자들이 지켜내신 우리의 소중한 한글을 위해. 이것이 나, 김슬옹이 걸어온 47년간의 주시경 참배의 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길이다.

 2025년 주시경 선생 111주기 추모 기념 사진
2025년 주시경 선생 111주기 추모 기념 사진 한글학회
#주시경 #한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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