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 오전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에서 열린 ”제65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김주열 열사 추모식“. 추모의벽 제막식.
윤성효
당국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극비리에 14일 아침 고향으로 옮겨 야산에 매장했다. 시민들은 크게 분개했다.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시신을 빼앗긴 것을 가슴 아파하던 시민사회단체는 뒤늦은 201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을 마산시 일원과 남원시에서 개최했다. 그의 묘지는 1964년에 묘비가 건립되기도 했으나, 사실상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
1990년대 중반, 그의 죽음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면서 묘지관리 및 추모사업이 진행되었다. 2001년 4월 19일 남원시와 마산시 김주열열사 추모사업회는 그의 고향에 '김주열로'를 지정, 이후 그의 모교 등에 표지석을 설치하여 열사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기렸다.
2002년에는 시신이 발견된 마산중앙부두에 안내판이 설치되었고, 이후 추모시설들이 보완되었으며, 2010년에 생가 복원과 묘지가 재정비되었다. 모교인 마산상업고등학교는 1995년 김주열 열사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으며, 해마다 3월 14일 김주열 열사 추모각에서는 '김주열 열사 제향과 추모식'이 개최되어 그의 넋과 민주정신을 기리고 있다.
제2차 마산사건을 촉발시켰던 김주열(金朱烈)군의 참혹한 죽음은 자유당 체제의 붕괴를 촉진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독재정권의 포악함과 잔인스러움이 여지없이 폭로되었고, 누적되어온 민중의 불만과,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던 학원의지(學園意志)를 불붙는 심지로 연결함으로써 자멸의 길을 재촉한 불길한 사건이었다. 김주열 군의 최후는 학생집단에 비상한 충격과 심리적 응집력을 주었고, 독재정권에 대한 적대감을 한층 강화시켰다.
마산의거의 정신을 이어받은 4월 18일에 나온 동래고등학교 결의문은,
전국의 학도여 눈을 뜨라 그대들 가슴에 진정한 선혈의 피가 흐를진대, 눈에 총알이 박혀 참살당한 내 형제가 대낮에 표류하는 마산을 생각하라. 평화적인 데모는 우리의 자유다. 마산사건에서 총부리 앞에 민주주의를 목이 메이도록 외치다고 쓰러지고 행방불명이 된 내 동족들의 살상에 책임지라. (주석 1)
1960년 봄, 열일곱살 소년이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을 얼굴에 박은 시신으로 떠올랐다.
소년의 죽음으로 마산 2차의거가 일어났고,
이 시민항쟁은 1공화국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의 서막이 되는 4.19혁명,
그 불길을 올린 소년 김주열은
당시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많은 고등학생들처럼
순수하고 꿈 많은 학생이었다.
우리는 김주열의 짭은 생애를 통해
한 평범한 소년이 역사의 한 복판으로 나아가
민주화의 초석이 된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2)
주석
1 > 고영복, '4월혁명의 의식구조', 강만길 외 <4월혁명론>, 99쪽, 한길사, 1983.
2> 전성태, <김주열>, 뒷표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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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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