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마을 연꽃마을 입구
장애라
강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목표를 벗어나 샛길로 접어든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잠깐만 들렀다 가기로 한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엄두도 못 냈던 여름 강변, 뜨거운 태양에 응답이라도 하듯 무성한 강변의 초록 풍경에 이끌려 잠시 길을 멈춘다. 이글이글 타는 더위가 무색할 만큼 초록잎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풍요롭다. 그 초록색은 뭉게구름 떠다니는 하늘, 그 하늘을 담은 강물과 어울려 유혹적인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타는 듯한 여름에는 처음 와 본다. 오늘 목적지인 소나기 마을이 가까운 곳이니 잠시 구경만 하고 가면 어떨까 한다.
차가 멈춘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의 연꽃마을. 무수한 연잎들이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 위에서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이곳 강변의 나무, 풀, 꽃들은 연잎과 다르고도 같은 초록빛으로 협연을 한다. 여름엔 이런 풍경이구나! 맑은 강물에 그 모습을 비추던 풀꽃의 하늘하늘한 유혹에 이끌려 조금만 걸어봐야지 하다가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고 만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더위를 이기는 시간.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더니 그 옛날처럼,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 더위를 잊은 마음은 흔쾌히 상상의 세계를 걷고 있다.
굽이 돌아가는 산길 옆 물가길.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걷기 좋은 최고의 길을 선정하라면 이곳 산과 물이 닿아있는 흙길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겠냐고. 수년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봄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럽 남부 피레네 지역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다 하여 이곳을 소개한 적이 있다.
피레네의 야생화와 초록으로 가득한 초원, 숲길, 계곡과 폭포의 아름다움을 입이 닳도록 설명하던 그들은 이곳을 걸으면서 조용히 침묵하더니 결국 감탄하며 아름다움을 인정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자연 풍경의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마침 길가에 화사하게 피어있던 숱한 봄꽃들과, 아름답게 울어주던 낭랑한 새소리와, 잔잔한 물 위를 비추던 투명한 햇빛, 그날따라 부드럽게 불어주던 바람에게 감사했다.
겸재 정선의 표현 그대로, 아름다운 호수

▲토끼섬 섬에서 바라본 연꽃마을
장애라

▲연꽃 토끼섬 앞 연꽃 연못
장애라
팔당댐 건설로 만들어진 물가 길을 걸어 토끼섬에 닿는다.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철모르고 걷는 무모한 여름 여행객을 맞아, 철든 연꽃 봉우리가 반갑다고 고개를 내민다. 폭염의 절정에서 그 수만 송이 연분홍 꽃들이 피고 질 때 쯤이면 더위도 여름날도 다 갈 것이다. 인적이 드문 여름 토끼섬 숲과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호젓한 강 풍경은 폭염에 짙은 이 초록 계절이 아니면 만끽하기 힘들 것이다. 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된 곳, 무심한 강물 위로 상상만 할 뿐, 흔적 없이 사라진 옛 모습은 마치 사라진 지난 꿈들 같다.
어디선가 솔솔 부는 바람이 반가운 초록 나무 우거진 길 끝에는 다산 생태 공원이 있다. 세계 여행을 많이 해보진 못하였으나 그래서 조금 용감하게 과장하면, 유명한 유럽의 도시를 흐르는 강들, 센강, 엘베강, 마인강 등등과 비교해봤을 때 도시를 흐르는 강 중에서 그 크기와 다양한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서 우리 한강이 최고가 아닐까 한다. 다산 생태 공원 앞의 강, 그것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굽이쳐 흐르는 큰 강인데 사계절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로 수놓은 이곳 한강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미호(아름다운 호수)라는 표현처럼 고요하게 아름답다. 큰물, 깊어서 그런가. 바로 그 강가, 시간이 멈춘 자리에 앉는다.
"강가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도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사공이 배를 젓다 잠이 들어도
저 혼자 나룻배를 저어 간대요"
<산바람 강바람> (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 동요)
생태 공원 가까이에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이 있다. 다산은 정조의 화성 행차를 위해 배다리를 축조해 한강에 뱃길을 만들었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빛나는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축조한 천재다. 다산의 재주와 노력, 뛰어난 사람들이 겪곤 하는 순탄치 않은 그의 삶을 엿보면서 길을 재촉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더불어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실제로 살았던 공간에 들러 그 인물의 흔적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독특한 길이다.

▲미호 다산 생태 공원앞 한강
장애라

▲마재마을 입구 다산로 마재성지로 들어가는 입구
장애라
그 길 끝에서 다시 연꽃마을 쪽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어귀에, 큰 돌로 된 마을 이정표가 있다. '마재마을'.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마을'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 마재 순교 성지가 조성되어있다. 그 옆을 숙연하게 걷다보면 한옥으로 된 독특한 성당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초록 풍광으로 시작해서 긴 역사를 가진 이 땅의 이야기 한 자락까지, 오늘 읽은 여름 책 한 권은, 먼 옛날의 독서처럼 더위를 잊게 했으나 그사이 잘 견디고 살아온 시간 덕택에 더 많은 것을 보게 해 주었다.
긴 세월을 돌아 흘러온 저 강물처럼 한여름의 폭염이 준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다가 우연히 머문 강변, 땀 흘린 발걸음은 지쳤으나 마음은 초록으로 가득하다. 오늘도 가지 않은 그 소나기 개울을 지척에 두고 차를 돌린다. 세상 경험은 말한다. 큰 기대를 안고 갔다가 오래 품은 상상의 세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그래서 어쩌면 예정 없이 뜻밖에 만난 한여름의 미호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고.
마치 끝나지 않아서 다행인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미완의 꿈이 더 애틋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이, 오늘은 그만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간직함으로 더 좋은 약속을 한다. 언젠가 소나기가 장하게 내리는 날, <소나기>의 개울을 찾아가자. '소나기가 뚝 그치고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 붓는' 징검다리를 건너보자. 만남이라고 쓰고 이별이라고 읽는 이 세상의 모든 소년, 소녀들의 첫 마음을 다시 읽어보자. 설렘을 기약하며 오늘은 우연히 발견한 미호 강가의 초록 여름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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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식물, 광물 등 좋아하는 것이 많아 지금까지 분주하게 세상을 살았습니다. 덕택에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임을 구석구석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서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도 매일 변화를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선택과 집중을 할 나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듣고 이야기 들려주기'를 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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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친구 데리고 갔던 이 길, 침묵 끝에 감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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