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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책임은 실종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베트남전쟁 종전 50년, 베트남전쟁 진실규명에 응답을! 6] 국민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록 2025.07.31 10:57수정 2025.07.3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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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베트남전쟁 종전 50주년이자 한국군 전투병 파병 6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에 베트남전쟁의정의로운해결을위한시민사회네트워크는 새 정부가 진실규명과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베트남 피해생존자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응답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기를 기대하며 7회에 걸쳐 연속기고를 싣는다.

2023년 2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재판부는 민간인 학살피해자 퐁니마을의 응우엔 티 탄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 1심 선고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틀 뒤인 9일 국방부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는 이동석은 이 소식을 듣고 "한국 정부 및 군부의 논리가 일본 정부, 극우의 논리와 똑같다"며 "그럼에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퐁니, 퐁넛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한 사법부의 판결은 재일동포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 우리도 일본 사회에 할 말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국인 대다수는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일본군 '위안부', 강제노동 문제 등에 대해 일본 정부에 진정한 사과와 인정을 요구해 왔다. 그럴 때마다 일본 사람들은 "너희들도 베트남 문제에 대해 인정도, 사과도, 안 하고 있지 않냐?"고 받아친다. 이동석은 이런 상황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당시 이동석과 나를 포함한 20여 명은 한베평화재단이 주관하는 '베트남 평화기행'을 앞두고 있었다. 평화기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1심 승소 덕분에 베트남 피해자를 마주할 때마다 마음의 부담이 조금은 줄었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2023년 2월 하미위령비 앞에서 추모하는 베트남평화기행단 하미 위령비에 얽힌 사연을 들은 기행단 성원들은 슬픔과 분노, 미안함과 안타까움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상태였다.
▲2023년 2월 하미위령비 앞에서 추모하는 베트남평화기행단 하미 위령비에 얽힌 사연을 들은 기행단 성원들은 슬픔과 분노, 미안함과 안타까움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상태였다. 김창섭

평화기행 과정에서 나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피해생존자 앞에 섰을 때 마음이 괴롭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하지는 않았고, 앞으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딱히 하지 않았다. 반면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냉대를 받아 온 이동석은 한국 사법부의 판결이 주는 의미와 자신이 일본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을 고민하고 있었다.

맹호부대의 군가와 함께 떠오른 충정비상의 기억

'이것이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고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도안홍레 감독의 다큐멘터리 <평화로 가는 길>을 시청할 때 '맹호부대 군가'가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나는 맹호부대 출신이다. 물론 이전의 맹호부대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자행했던 전쟁범죄에 대해 해당 부대 출신이라고 대신 사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맹호부대의 군가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흘러나온 그 순간 떠오른 건, 오래전 맹호부대 복무 당시 서울을 향해 출동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의 경험이었다.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고,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일 새벽 6시에 우리 부대에는 여느 때와는 매우 다른 비상이 걸렸다. 통상 군대의 비상은 '도식(차량)적재' 혹은 '차량 적재' 방식이어서 행정병이었던 나는 행정 서류를 차량에 싣고 보초를 서다 보면 몇 시간이 지나 비상이 풀리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충정비상'으로 완전 무장을 갖추고 모든 물품을 차량에 싣고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로부터 불과 7년 전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던 부대원들은 이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고 느꼈다. 우리 부대의 집결지는 서울 남대문시장이었고 시위대에 밀리면 이화여대가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다행(?)스럽게 노태우의 당선이 확정되자 자정에 비상이 풀렸다. 총칼을 앞세우고 서울을 점령해야 한다는 부감감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날의 충격은 한동안 지속됐다.

만일 그날 계획대로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사건 이후 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베트남 참전군인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랬다면 "국가의 명령대로 했을 뿐이니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도 국가의 피해자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나라 안팎에서 지속되어온 군과 국가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역사

일본 전범들을 상대로 구술 작업을 수행한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는 <전쟁과 죄책>(또다른우주, 2023)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전범국 일본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학살을 행한 각 개인도 국가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끔찍한 학살에 대해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정부 수립 이후 군과 국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1948년 4월 제주도 도민들을 학살한 것을 시작으로 여수·순천 학살 당시에는 여수 시내에 함포사격까지 했다. 이후 한국전쟁 시기 거창 양민학살 및 보도연맹 사건, 1960년대 말~70년대 초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에 이어 미수에 그쳤지만 1987년 충정비상에 의한 출동준비 등 거의 10~20년 주기로 민간인에 대한 한국군의 위협은 나라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3일 시민들은 또다시 총을 든 군인들을 목도해야 했다.

2025년 1월 윤석열 퇴진 집회 시민 통제 없는 군부는 항상 민간인에게 위협이 돼 왔다.
▲2025년 1월 윤석열 퇴진 집회 시민 통제 없는 군부는 항상 민간인에게 위협이 돼 왔다. 김창섭

베트남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는 하재홍은 "살인 경험이 있는 군인들은 다른 병사들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명령만 떨어지면 망설임이 없다. 한국에선 학살이 진행되던 시기 군 내부에 학살 경험을 갖고 있는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군의 해외 파병을 적극 저지해야 하는 이유는 외국에서 경험한 것들이 한국에서 수행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국가의 명령만을 수행하는 군대가 민간인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는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최근까지 가자지구에서도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계엄을 평화 시위로 극복했다는 한국의 시민사회는 군부의 시민 통제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 오히려 대부분의 남성이 군대를 다녀온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한국 내 군사 문화는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자랑하는 전쟁기념관의 해외파병실

서울 용산에 소재한 전쟁기념관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기념관은 전쟁을 반성하고 앞으로 전쟁을 방지하자는 목적보다는 한국군의 성장과 한국 무기의 성능, 그리고 해외파병의 성과를 자랑하는 공간이다. '전쟁을 자랑하는 곳'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특히 기념관 내 따로 마련한 해외파병실의 베트남관의 실상은 참담하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행한 일들에 대한 왜곡과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인해 한국경제가 성장했다는 논리로만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에서 한국군이 민간인에게 자행했던 가해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여러 이유로 베트남 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가 이 같은 과거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도 변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배상 결정' 1심 판결에 대한 한국 정부의 항소에 대해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존중해달라"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을 뿐 아니라, 팜 투 항(Pham Thu Hang) 베트남 외교부 부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한국 법원의 판결과 한국 정부의 대응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제쳐두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을 옹호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인 대다수는 일본에 대해서는 피해자임을 강조하지만, 베트남전쟁 시기의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왜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국가에 의한 폭력을 민족적 관점으로만 보는 경향마저 나타난다. 예컨대 1993년 8월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에 대해 한국의 일부 시민단체가 "일본인 '위안부'는 매춘부이며 한국인 위안부가 진정한 피해자다"라고 주장해 큰 논란이 된 바 있다.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가해경험을 성찰하는 새로운 한일시민연대의 모색

이동석은 "우리도 베트남에 대해 가해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정할 때 일본 사회에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폭력 일반에 대해 대응하고 이를 위한 연대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 주장이지만,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에 대한 사과와 인정이 일본군 '위안부'문제나 강제노동 등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기 위한 방편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가해 행위를 인정함으로써 국제사회에 만연한 국가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2025년 6월 18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하미 사건 행정소송 베트남 퐁니마을과 하미마을에서 온 두 응우옌 티 탄의 한국방문
▲2025년 6월 18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하미 사건 행정소송 베트남 퐁니마을과 하미마을에서 온 두 응우옌 티 탄의 한국방문 김창섭

그러므로 이 문제는 한국과 베트남 양 국가만의 문제로 논의를 협소화해서는 안 된다. 모든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계기로서 베트남전쟁 시기에 자행된 폭력에 대응하는 국제연대로까지 고민을 확장할 수는 없을까?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그렇기에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소박한자유인과 한베평화재단은 올해 초 일본 오사카의 시민사회에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제를 가해국의 입장에서 공동대응하자는 제안을 보낸 바 있다. 일본 또한 베트남전쟁의 후방기지였고, 일본 국내에서 베트남전쟁 저지 투쟁의 열기가 뜨거웠다.

공동제안을 받아들인 일본의 시민단체 구성원들은 전쟁 당시 20대였고, 이제 70대가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배과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나열해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전쟁이라는 사고의 회로를 통해 가해의 경험을 함께 마주하자는 작지만 구체적인 연대의 물꼬를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베트남전쟁시기한국군에의한민간인학살 #소박한자유인 #전쟁과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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