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왔다.
권우성
박정희 정권은 평화통일 논의를 봉쇄하고 혁신계의 정치활동을 차단하는 등 극우적인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수병 열사는 1971년 1월 서도원·이영석·김세원·우홍선 등과 경락연구회를 조직하고 통일문제 등을 토론했다. 이 시기 생활비를 벌고자 일어학원 강사를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일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한국사회를 다시 계엄령과 긴급조치라는 반민주·반헌정 질서가 강화하고 많은 학생·민주인사들이 체포하였다. 국민적 저항에 몰린 유신권력은 인혁당재건위라는 사건을 날조하고 그와 동지들을 엮었다.
1974년 4월 18일 영문도 모르는 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갔다. 모진 고문이 자행되었다. 검찰에 넘겨져 방대한 조서가 꾸며졌다. 그들이 작성한 조서가 가혹한 고문으로 만들어져 자신도 생판 모르는 사건이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국가지하단체를 조직했다는 상투적인 '고정답안'이 그대로 적용되어 1심에서 최종심까지 사형이 선고되었다. 1심과 2심은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였다. 결과는 대법원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부에서 판사를 지낸 민복기 대법원장의 주재로 2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다른 대법관들 역시 친일 판사들이었다.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한 다음날(4월9일) 새벽 4시 55분부터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수병 열사는 세 번째 순위였다. 당국은 가짜 유언을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다. 종교의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형집행 당시 군종목사로서 현장을 지켜봤던 박정일 목사는 뒷날 이수병 열사 유언은 "내가 죽는 이유는 오로지 민족민주운동을 했기 때문이다"였다고 증언했다.
노무현 정부시절에 사법부는 (2007년 1월 23일) 이들 8인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고향에 묻혔다가 2018년 이천에 있는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이수병선생 기념사업회'는 2025년 4월 그의 모교인 경희대학 정경대학 303호실을 '이수병 강의실'로 지정하고, 50주기 추모식과 '이수병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주석
1> <민족일보>, 1961년 2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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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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