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정남 '상고이유서' 첫 장
정운현
박정희 정권은 그를 콕 찍어서 처음부터 사형을 노렸다. 여정남 열사의 <항소이유서>의 한 자락이다. "긴급조치하인데 법이 무슨 필요냐? 정보부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어느 정도는 시인해야지. 안 그러면 재판 도중이라도 끌어내다 박살낸다"는 협박을 여러 번 당했다. 고문으로 정신상태가 혼미해진 가운데 부르는 대로 받아썼다. 조작을 해도 좀 똑똑히 하라고 타일렀다.
여정남 열사 등 8명은 비상고등군법회의 (1, 2심)를 거쳐 일제강점기 총독부 판사를 지낸 민복기 대법원장의 주재로 열린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그동안 가족 면회나 변호사 접견도 거부당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호소에도 법원은 철저히 이를 외면한 채 법비 노릇에 충실했다.
여정남은 처음에는 민청학련 관계자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혁당재건위 학원 담당책이라는 이유를 덮어씌워 인혁당 관련자 7명과 함께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다음 날인 1975년 4월 9일 새벽 사형을 집행당했다. 유신 당국은 송상진·여정남의 시신을 싣고 있던 운구차를 크레인을 동원하여 강제로 탈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고는 벽제화장장에서 화장한 뒤에 유골만 가족에게 인계했다. 이는 정부 당국이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받은 엄청난 고문 흔적을 감추려고 벌인 반인륜적 소행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주석 3)
법원은 유족의 재심 청구에 따라 2007년 1월 23일 무죄를 선고했다. 여정남 열사의 유해는 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돼 있다.
주석
1> 편찬위원회 편,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5~1979 청춘, 시대를 깨우다>, 2017.
2> 한승헌, <자서전>, 169쪽.
3> 앞의 책,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5~1979 청춘, 시대를 깨우다>, 2017.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