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듣기
  • 인혁당사건 엮여 사형 당한 김용원 열사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 10] 정의감이 강력했던 그에게 시국은 시름을 앓게 하였다

    등록 2025.08.06 15:07수정 2025.08.06 15:07
    0
    원고료로 응원
     인혁당 사건 희생자인 고 김용원 선생 묘.
    인혁당 사건 희생자인 고 김용원 선생 묘. 민주화운동기념공원

    김용원 열사는 1935년 11월3일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함께 부모의 고향인 경남 함안군 군복면 수곡리로 돌아왔다. 가족은 농토가 없는 고향에서 살기 어려워 부산으로 이사했다가 몇 해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일본→함안→부산을 거쳐 본향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13세가 되어 늦은 나이에 고향의 월초초등학교를 거쳐 큰형이 사는 부산으로 가서 부산중학교에 입학하고, 이어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6.25전쟁으로 부산은 피난 수도가 되고 학교는 군용 천막교사였으나 훌륭한 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뒷날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윤이상 선생이 음악교사이고, 역사학자 이우성 교수는 당시 이 학교의 역사교사였다.

    김용원 열사는 두뇌가 우수하여 1985년 문교부에서 실시한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에 수석합격하고 이듬 해 서울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에 이승만의 폭정이 계속되고 나라 사정은 매우 어려워졌다. 그는 재학 중에 학도병(1550)으로 1년6개월 복무하고 1960년 6월 제대하였다. 4월혁명 직후였다. 복학하고 1955년 학부들과 만들었던 '암장'의 회원들과 다시 만나 활동을 시작할 즈음 5.16쿠데타의 불벼락을 맞았다.

    정의감이 강력했던 그에게 시국은 시름을 앓게 하였다. 가까운 동지 대부분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투옥되었다. 이때 그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군복무 기간과 겹쳤기 때문이다. 생업을 위해 고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첫 직장으로 동양중고등학교 시간강사가 되었다. 1964년 7월 유승옥과 결혼,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서울시 교육공무원 특별 채용 전형시험에 합격하고, 1971년 경기여고 정교사로 발령받아 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박정희가 한일굴욕회담을 강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각계 각층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가 속한 동양중고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피해 가지 않았다. 정국은 6.3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1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났다.

    아직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그는 9월 30일 중앙정보부원에 체포되어 감금되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인혁당'이란 듣도보도 못한 사건으로 엮은 것이다. '암장'시절의 동지들과 함께였다. 10여 년 전 결성되어 청년학도들의 토론장이었다. '암장'이 엉뚱하게 반국가 단체로 둔갑한 것이다.
     고 김용원 선생 생전 가족 사진.
    고 김용원 선생 생전 가족 사진. 4.9통일평화재단

    김용원은 1974년 7월 1심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가족에게 파면통지서를 보냈다. 이제 아직 1심 선고인데도 파면한 것이다. 그는 항소했으나 역시 극형, 상고심도 다르지 않았다. <항소이유서>의 일부이다.

    (나) 공소 제16항에 대한 반론 19개, 4. 2. 20:00경 초월다방에서 역시 취직에 필요한 (돈을)빌려달라던 것을 다 주지 못하고 전세받은 것 중에서 30,000원을 빌려주고 빨리 갚으라고 당부하고 헤어졌을 뿐 여정남이 학생데모에 관한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한 말이 없습니다.


    결코 4.3일 데모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실도 없고 데모자금을 제공한 사실도 없으며 공소 제16항의 사실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도합 190.000원을 유진곤으로부터 학생 데모자금조로 제공받은 것처럼 되어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은 1974. 1월 말경 또 동년 2월 중순 각각 50.000원씩 집수리비 조로 유진곤으로 부터 빌렸던 것이며 동년 3월 초순에 40,000원 동년 3월말 50,000원을 항소인의 회의 치료비 조로 빌린 것이다.


    검찰은 친구끼리 가정사로 돈거래를 불순자금으로 몰아 기소하고, 법원은 피의자들의 발언과 변론을 묵살한 채 권력자의 지침에 충실하게 복무한 것이다.

    당시 갈비탕 한 그릇에 500원, 쌀 한가마니가 3천 3백원 하던 시절이니 19만 원은 꽤나 큰 금액이었다. 현재로서는 19만 원이 모두 여정남에게 건너 간 것인지 아니면 일부만 건너간 것인지 등 파악할 방법은 없다. 다만 검찰의 주장대로 김용원이 여정남에게 자금지원을 했다 한들 이것으로 김용원을 사형대에 세우는 것은 지나친 판결이었다.

    윤보선 대통령도 민청학련에 자금 지원을 했다. 윤 대통령의 자금은 박형규 목사와 이우정 교수를 거쳐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공소장에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선동,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자금을 주는 등 내란을 선동했다."고 적혀 있다. (주석 1)

    김 열사 부인의 회고이다.

    남편이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대요. 그래서 다니던 부산고등학교를 다 못다니고 2학년 때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를 마쳤지요. 게다가 검정고시 수석을 했답니다. 그게 <국제신문>에 실리기도 했대요.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의리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서울대 물리학과에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자신도 형편이 어려웠지만, 등록금을 못 내는 친구에게 몇 번 그 돈을 주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는 동양공고에서 시간강사를 하다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때 받은 월급에서 저축도 하고 알뜰하게 살았지요. 1969년에는 저축한 돈으로 방화동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했지요.

    그때 참으로 기뻤죠. 박봉에 참으로 열심히 살았어요. 그리고 서울시 교육공무원 시험을 봐서 수석으로 합격했죠. 그때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던지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남편이 남다른 수재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어요. 합격 후에는 경기여고 물리교사로 발령이 났죠. 정말 그때는 이제 살림이 좀 피는가 보다 하고 희망찬 내일을 꿈꾸곤 했죠. (후략) (주석 2)

    주석
    1> 이창훈, 앞의 책, 434쪽.
    2> 앞의 책, 37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민족민주열사열전 #김삼웅인물열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사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차에서 울먹이는 관광객..." 목숨 걸고 가야하는 여수 '힐링마을' "차에서 울먹이는 관광객..." 목숨 걸고 가야하는 여수 '힐링마을'
    2. 2 3만8천원 김밥이 불티나게 팔리는 곳... 한국말 조심하세요 3만8천원 김밥이 불티나게 팔리는 곳... 한국말 조심하세요
    3. 3 "테슬라는 우리 생각보다 위험하다" 어느 교수의 일갈 "테슬라는 우리 생각보다 위험하다" 어느 교수의 일갈
    4. 4 '장관 후보 용혜인 14일'이 남긴 것 '장관 후보 용혜인 14일'이 남긴 것
    5. 5 전 세계에 만 마리도 안 남았는데... 쌍둥이가 태어났어요 전 세계에 만 마리도 안 남았는데... 쌍둥이가 태어났어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