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롱사람들의 생명수였던 용천수 덕지물 지금은 풀로 무성하게 덮여버렸다.
김순애
수운교 법당은 엄마와 아빠의 고향이며 내가 나고 자란 오도롱 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로 옆에는 마을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던 용천수 덕지물이 있다. 동네 삼촌들은 새벽마다 하루 동안 사용할 물을 떠오기 위해 허벅을 등에 지고 덕지물로 향했다.
덕지물 바로 옆에 나있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수운교 법당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4.3 당시 깊게 상처 입은 마음을 의탁했다. 동네 사람들은 수운교 법당을 절과 유사하게 여겼고 법당은 4.3의 원혼들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남은 후손들에게 화가 닥치기 않게 해달라는 소망을 간절하게 표출할 수 있는 장소였다,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서는 원혼들의 이름을 한자로 정리해야 했다. 나는 엄마를 도와 우리 쪽 족보와 엄마 쪽 족보를 찾아서 조상들의 이름을 써내려갔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엄마와 아빠의 가계도를 그려보기도 했다. 어려서 우리집에는 유독 제사가 많았는데 특히 봄에 연이어 제사가 이어졌다. 나는 제삿날이면 사촌들과 동네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고 다음날에는 엄마가 싸주는 음식을 동네 이웃들에게 가져다 드렸다.
우리집만 제사가 많았던 것이 아니다. 작은 아빠는 손 없이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는데 작은 아빠 네도 우리집 만큼 제사가 많았다. 할아버지 사촌들이 다 죽고 유일하게 남은 남자가 할아버지라서 제사를 다 지낸다는 말을 어려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나의 증조부 김병수는 밑으로 김병휴, 김병림, 김병필 등 세 명의 남자 형제를 뒀다. 그들은 각각 김성호, 김정호, 김태호, 김덕호, 김양호, 김완호, 김군호를 자식로 두었는데 나의 증조부는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두었고 나의 조부 김성호는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 중 셋째였다.
엄마 쪽을 보면 엄마의 아버지 김희휴는 김유아와 결혼해서 7남매를 두었는데 엄마는 그 중 섯째였다. 엄마의 외할머니 양능은 김임규, 김환규, 김대규, 김창규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 데 그 중 하나가 엄마 김유아다.
이들 중 4.3때 희생된 분들을 보면 증조부 김병수와 부인 고씨, 동생인 김병휴와 부인 김씨, 김병필의 부인 변석이 산으로 피난갔다가 얼어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고, 그들의 자식들인 김덕호, 김완호, 김군호가 형무소에 끌려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김완호의 부인 김갑심은 산에서 행방불명되었고 그들의 아기는 산에서 얼어죽었다. 나의 조부 김성호는 사촌 형제들 중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았지만 역시 큰아들 김인옥을 토벌대에게 잃었다. 김병휴의 손녀 역시 산에서 피난 중 계곡에 쓸려 내려가 죽었다.
엄마 쪽을 보면 엄마의 외할머니 양능이 토벌대에게 총살당했고 엄마의 외삼촌 김임규, 김환규, 김대규, 김창규가 총살당하거나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엄마의 막내 이모 김선아 역시 희생당했다. 엄마의 아버지 김희휴는 산에서 내려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고 오빠 김왈림은 산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했으며 언니 김순정과 그의 약혼자는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되었고 아직 이름을 호적에 올리지 않은 막내 동생이 산에서 얼어 죽었다. 엄마가 천도재에 이름을 써넣은 조상이 양쪽 집안을 합쳐서 40명인데 그 중 4.3으로 희생된 분들이 서른 명 정도였다.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 원혼들의 이름 우리 집은 원혼이 많은 집으로 동네에서 말이 많은 곳이다.
김순애
엄마와 아빠 집안 양쪽은 모두 4.3 원혼이 많다고 동네에서 소문난 집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의 결혼을 처음에 원치 않았다. 같은 동네에서 원혼 많은 집안끼리 엮이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4·3 때 친형과 세 명의 오촌 형제들이 몰살당하다시피 한 집안에서 아빠는 사실상 일가 친척의 모든 일들을 떠안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삶도 심난한데 자기 가족만큼 속 시끄럽고 복잡한 집안이라고 동네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아빠의 집안을 처음부터 쳐다보기도 싫었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집안이 엮이게 되었고 엄마는 동네에서 소문이 무성했던 시아버지의 주사를 매일 같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하루라도 술을 거르는 날이 없었고 술 마시고 들어온 날이면 집에 있는 그릇들을 집어던지며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곤 했다.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가 행패를 부리면 참지 않고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4·3 때 부모와 큰아들, 삼촌들과 사촌들을 모두 잃었다. 한 집안이 몰살 당해도 시신을 거둘 손 하나는 남는다고 하는데 그 손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학살당한 일가친척들, 산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혼자 몸으로 다 거두었고 그들의 제사를 도맡아 지내야 했다. 그렇게 그가 맡은 제사가 일 년에 스무 번이 넘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유일한 아들이고 딸 많은 집안이어서 그랬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후손도 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조상들이 많았던 것이다. 시아버지는 가까스로 살아내면서 조상들의 제사를 지냈지만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 없는 살림에 한 해에 스무 번 넘게 제사를 지내야 했던 할머니 역시 고된 삶을 살았다. 둘은 삶의 고됨을 때로 서로를 향해 악다구니를 하면서 견뎌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손윗누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 사이가 급격히 틀어진 원인은 산에서의 피난 생활 중 노모의 기막힌 죽음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노모를 모시고 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노모가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손윗누이는 그 책임을 당시 어머니를 모시던 남동생 탓으로 여긴 것이다. 토벌대에게 쫓기는 신세였던 할아버지는 본인이 토벌대에 잡히는 바람에 노모를 산에 혼자 둘 수밖에 없었고 노모는 며칠을 그 자리에서 산송장으로 버티다 결국 숨이 멎은 것이다.
같이 피난을 갔던 다른 친척들이 송장 상태로 얼어붙은 노모를 발견하여 임시로 땅에 묻었고 할아버지는 4·3이 끝나고 나서야 산에 올라가서 노모의 시신을 모셔와 다시 정식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그 일에 대해 누이는 남동생에게 '어떻게 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산에 그냥 둘 수 있었냐'고 두고두고 원망하면서 싫은 소리를 했고 그렇게 해서 누이들과 오라방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4·3이 사람들에게 남긴 커다란 상처는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억울함과 서운함, 분노 등의 여러 감정들과 뒤섞여 부글부글 끓다가 어느 순간 터져 나왔다. 술로 삭히기도 하고 노동으로 잊기도 했던 그것들은 불쑥 불쑥 일상에 끼어들어 마음과 관계를 왜곡시켰고 마을사람들은 또 그것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엄마는 종종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다. 그 당시에는 시아버지의 주사가 너무 지긋지긋하고 싫었지만 지금은 조금 시아버지의 심정이 헤아려진다고 했다. 그의 어깨에 주렁주렁 매달린 원혼들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가슴 바닥에 웅크린 한과 울분은 얼마나 컸을까? 술을 진탕 마셔야만 잠을 잘 수 있었던 삶, 술에 취하면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애먼 이들에게 행패를 부렸던 그의 삶.
3일의 천도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의 얼굴은 자신이 해야 할 오래된 숙제를 마친 것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수운교 법당의 신도들인 동네 삼춘들이 천도재 마지막날을 함께 해주어서 오랫만에 그들을 만났다. 엄마 또래인 그들은 모두 평생의 노동으로 얼굴은 시커멓고 허리는 굽어있고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자글자글 주름진 살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그들 대다수가 4.3 당시 남편을 잃거나 부모를 잃었다.
참고서적: 제주여성사II, 제주발전연구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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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스무 번 제사, 원혼 많은 집안을 위한 엄마의 천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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