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半) 왔습니다. 테라디요스 가는 길에서 만난 400km 표지석
김상희
테라디요스에서 7킬로미터를 더 걸으니 메세타 지역답지 않게 번화한 곳, 사아군(Sahagún)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곳에 숙박할 걸 그랬다.
사아군은 11세기와 12세기에 크게 번성했던 곳으로 교회 권력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알폰소 6세의 왕위 쟁탈을 도운 대가로 돈과 권력을 갖게 된 베니토 수도원(San Benito)은 당시 스페인 최대 수도원이 되어 휘하에 100여 개의 수도원을 거느렸다고 한다. 사아군은 800km 산티아고 길의 중간 지점을 지나는 곳으로 '400km 증서'도 발급해 준다.

▲ 한때 스페인 최대 수도원이었다는 산 베니토 수도원의 아치(Arco de San Benito)
김상희

▲ 사아군은 벽돌로 지어진 무데하르 건축물을 많이 볼 수 있다. 마을 외곽의 무어식 아치
김상희
반갑게도 가는 날이 토요일 장날이다. 과일이며 치즈 같은 식자재외에도 옷과 신발도 많았다. 신발을 보자마자 웬 '신(神)의 가호'인가 싶었다. 신발을 사기로 했다.

▲ 메세타에서 만난 도시 중 가장 활기찬 사아군
김상희
순례길 쇼핑은 스피드가 생명이다. 이 신발 저 신발을 신어보다가 25유로를 주고 운동화 한켤레를 샀다.

▲ 사아군과 토요일의 만남. 스페인에는 토요일에 시장이 열리는 경우가 많다.
김상희
웬 신발 쇼핑? 사실은 일주일 넘게 걸을 때마다 양쪽 발등이 아팠다. 문제없어 보였던 신발 윗부분이 빗물에 젖어 급속히 해졌는지 발등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발이 물집에서 벗어나자마자 발등 통증이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준비물 중 가장 공들여 준비했던 내 신발'로부터 내 발이 공격당하는 신세라니...
통증을 덜어 보려고 매일 아침 발등에 테이프를 붙이고 양말을 반 접어 덧대고 그 위에 이중으로 양말을 신었다. 최근 지나온 마을에는 신발 파는 곳도 없어 통증을 참으면서 걷고 있는 중이었다.
발등을 아프게 하던 신발을 벗어던지니 날아갈 것만 같다. 이런 걸 해방이라고 하지. 전반전 다 걸어냈다고 딱 중간 지점에서 받은 상이 아니면 무엇이랴. 전반전 400킬로미터는 끝났고 지금부터 후반전 시작이다.

▲ 새 신을 신고 걸어보자, 성큼!
김상희
사아군 시장에서 납작 복숭아 한 봉지도 샀다. 우리나라에 없는 과일이라 호기심에 샀는데 한 입 베어무니 입 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진다. 발이 편하니 온몸이 편하다. 당 지수까지 오르니 몸이 더 가볍다.

▲ 길 위에서 먹는 납작복숭아는 과일이 아니라 사랑!
김상희
후반전 선수 교체는 절묘했다. 나는 이 신발로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나머지 400킬로를 성공적으로 걸어냈다. 새 신발이 가져다 준 행운인지 방수 기능 없는 새 신발을 신은 이후로 단 하루도 비를 만나지 못했다. 사실 비가 왔다 하더라도 잘 젖는 대신 잘 말랐겠지.
내가 직접 실험해보았다. 신발? 너무 고민하지 마시라. 접지력에서 공인받았다는 '비브람창' 밑창, 방수 기능의 '고어텍스' 신발이 아니어도 아무 지장 없었다. 현지 시장에서 구입한 3만 원대 운동화로도 아무 문제 없었다. 결국 걷는 건 '신발'이 아니라 '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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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여행자입니다. 여행이 일상이고 생활이 여행인 날들을 살아갑니다. 흘러가는 시간과 기억을 '쌓기 위해'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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